대나무 숲길을 지나 단지 몇걸음을 옮겼을 뿐인데도 마치 시대를 거슬러 점잖은 양반네 정원 안뜰에 들어선 듯한 느낌. 바로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서 맛보는 기분이다. 스스로를 ‘소쇄처사’라고 부르며 한평생 은거생활을 하던 선비 양산보가 마음을 다스리던 곳답게 정갈한 가옥과 정자,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찾는 이의 소란스러움을 가볍게 덜어내준다. 조선 중기의 대표 정원인 이곳은 면적이 4천60㎡. 그다지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한번쯤 발걸음을 해볼 만큼 특별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조광조가 능주에 유폐되자 세상에 뜻을 접고 낙향한 선비, 양산보는 이곳에 터를 잡고 은거를 시작했다. 요즘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드라마 <여인천하 designtimesp=21497>의 한 장면이었던 조광조의 유폐는 예사롭지 않았던 사건이었던 듯 한 선비의 회귀로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얻을 수 있었음은 후세에겐 어쩌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른다.시원한 가을 바람을 느낄 만큼 그늘진 대숲을 지나 소쇄원의 입구로 들어서면 ‘사적 304호’로 지정된 이곳의 관리실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허름한 민가의 형상이지만 양산보의 후손들이 사적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는 집. 무료 입장인 까닭에 정부의 원조금에만 의존해서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복원, 관리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입구에서 정원을 바라보면 넉넉한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마당에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담장 아래 뚫어진 작은 구멍으로 자연 그대로의 계곡이 흘러 들어오고 심산유곡의 물소리를 즐길 수 있도록 협곡 사이로 유연한 물줄기가 뻗어내려온다. 작은 연못, 푸른 빛의 죽림, 노송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이 솜씨 좋은 화가의 그것처럼 멋진 산수화를 만들어내고 계곡물 위를 건너게끔 놓인 외나무 다리는 이방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쇄원의 전체 설계는 시냇물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주변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맨 윗쪽 단에는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 아랫쪽 시냇가에는 광풍각이 자리잡고 있다. 제월당에는 김인후가 보고 느낀 소쇄원의 48가지 모습을 담은 ‘소쇄원 48영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처음 양산보가 소쇄원을 조성할 때 언덕과 골짜기 돌 못 등 하나하나에 직접 간여했을 뿐만 아니라 ‘소쇄원을 팔지도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도 말라’고 유언까지 했다고 한다. 언젠가 윤선도가 만든 보길도가 그 덕분에 빛이 되듯 소쇄원 역시 양산보의 손길 아래 아름다운 정원으로 거듭난 듯하다. 가족끼리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인 듯 싶다.●여행정보호남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만나는 고서 IC로 진입해 887번 지방도를 타면 고서주유소 4거리. 이곳에서 직진하면 식영정과 소쇄원이 차례로 나타난다. 광주호를 끼고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