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갈등 보다는 밀월 관계 유지 … 3자간 틈바구니 속 ‘영원한 을’ 서민만 눈물
계약의 당사자인 갑과 을. 둘 사이를 평등이라는 기본 전제가 무너지고 어느 한쪽이 우월한 지위에 서있는 불평등 관계로 간주한다면 ‘갑과 을’의 논리가 법조계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른바 ‘법조3륜’이라 불리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 사이의 관계는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은 서로가 계약의 당사자도 아니다.치열한 경쟁 끝에 법조계에 입성한 이들은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는 무수한 대립과 갈등, 때로는 밀착 등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여기에 형사사건 피의자(또는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 고소·고발인, 진정인, 민사소송의 원고와 피고 등 사건 관계인까지 끼어들면 매우 어지러운 구도가 되고 만다. 따라서 딱히 누구를 갑, 또는 을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얽히고 설킨 법조계 … 갑과 을 구분 모호경우에 따라 상대방보다 우월한 지위에 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대방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물론 본인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갑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다. 특히 법조계에서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횡포’보다는 양쪽 당사자가 이런 서로의 입장을 이용해 지나치게 가까워짐으로써 말썽을 빚는 경우가 많다. 이용호 게이트를 비롯해 최근 국내를 시끄럽게 했던 일련의 의혹 사건들은 얽히고 설킨 법조계와 주변의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냈다.그 중에서도 가장 눈총을 받은 곳은 검찰. 이씨 비호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검찰은 사상 처음 특별감찰본부까지 설치해 고위간부들을 공개 소환, 조사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 결과 지난해 서울지검이 이씨를 수사할 당시 서울지검장이던 임휘윤 부산고검장과 특수부를 지휘하는 3차장이었던 임양운 부산고검 차장, 이덕선 군산지청장(당시 특수2부장) 등이 한꺼번에 옷을 벗었다. 주가조작 등 혐의로 진정서가 제출된 이씨를 조사한 뒤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형사입건은 미루는 불입건(입건유예)이라는 어정쩡한 조치를 내린 게 화근이었다.특감본부 조사결과 지난해 수사는 과거 이씨의 동업자 제보로 시작된 뒤 검찰간부들의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불입건 처리된 것으로 밝혀져 사건처리 전 과정에 걸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진정인의 제보로 수사에 착수한 이지청장은 그의 요청으로 수사중인 사건과 전혀 별개 사건에 대한 합의를 종용했고, 임고검장은 이씨에게 조카의 취업을 부탁했으며, 임고검차장은 수사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는 발언을 한 것으로 특감본부는 결론지었다. 따라서 이용호 게이트의 발단은 검찰과 진정인 사이가 비정상적으로 가까워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올해 서울지검 동부지청이 수사했던 벤처기업 C사의 주식분쟁 와중에 벌어진 폭력사건에서도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는다. 진정인과 ‘부적절한 대화’가 담긴 녹취록이 공개돼 사표를 낸 김진태 당시 동부지청 형사4부장이 검찰인사에 대한 정치권의 영향력 등 불필요한 부분까지 언급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거의 없다.법조인 사이에서 변호사들은 상대에 비해 몸을 낮추는 데 익숙한 것처럼 보이기 쉽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의뢰인이 구속되는 것을 막거나 처벌 수위를 낮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위 법관이나 검찰간부 출신 변호사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전관예우’라는 말은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다. 검찰총장 출신 김태정 변호사가 지난해 검찰 고위간부에게 이용호씨를 위해 전화변론을 해주고 1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것은 이런 관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언뜻 보면 대립적 요인이 많을 것 같은 변호사와 판·검사의 관계가 실제로는 갈등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변호사와 판사의 관계도 변호사-검사 사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민사나 형사소송 가릴 것 없이 법정에서 어떤 내용의 변론을 펼치느냐 하는 문제보다 어느 변호사를 선임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게 상식으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의뢰인들은 구속영장 발부 여부와 양형 수준, 보석 등이 전적으로 변호사에게 달려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상황이 이렇다보니 한 사이버로펌은 학연 지연 근무경력 등을 토대로 법조인끼리의 친소 관계와 신상정보를 담은 ‘친밀도 리스트’ 서비스를 실시해 변호사단체로부터 서비스 중단 요청을 받기도 했다.검찰과 법원 사이에는 그나마 갈등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있다. 97년 도입 당시부터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온 영장실질심사제도와 법원의 양형, 구속영장 발부 기준 등이 양자간의 단골 쟁점으로 꼽힌다. 특히 검사들은 영장실질심사제에 대해 “실질심사라고 하면 검찰은 허수아비 판단을 하고 있단 말이냐”며 용어 문제부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고개 숙여도 “무의식중 나는 갑” 강해법원과 검찰의 쟁점은 대부분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뿐 아니라 범죄의 일반적 예방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데도 두 기관의 자존심 싸움 속에서 자칫 그 중요성이 간과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최근 법원이 형사재판 개선을 위해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을 상대로 의견수렴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실질적 개선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법조계에는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아닌 제3자가 있다. 바로 일반 국민이다. 비(非)법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죄를 지어 수사나 재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을 고소·고발한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민사소송에 휘말려 원고와 피고란 이름표를 붙이기도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데 여기서 비로소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 일부 계층은 말 그대로 변호사를 사거나 고용하지만 대부분의 민초들은 변호사에게 목숨을 걸고 매달린다. 수사나 재판 결과에 따라 인생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그동안 의뢰인들은 고수임료 등으로 인해 법률서비스의 높은 벽을 실감하곤 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자 정원이 크게 늘어나 접근성이 어느 정도 용이해졌지만 변호사들로서는 경쟁만 치열해진 셈이 됐다. 법률시장 개방마저 코앞으로 다가와 변호사 업계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이런 환경 속에서 최근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고위 법관이나 검찰간부 출신 변호사들은 수임료와 입맛에 따라 느긋하게 사건을 고르는 반면 “사무실 운영비를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 엄살 부리는 변호사도 점차 늘고 있다.그러나 개개인의 사정이 어떠하건 변호사와 판사, 그리고 검사라면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갑 자리에 서게 될 기회가 있다. 이따금 본인 의지와 정반대로 고개를 숙이지만 그럴 때도 이들의 무의식중에는 자신이 갑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들은 좀처럼 스스로를 갑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법조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익적 성격이 강한 법조인 사이에는 갑과 을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갑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결국 아무런 법률적 지식과 돈, 그리고 힘도 없이 그저 갑의 합리적이고 공평무사한 처분만을 고대하는 평범한 우리 이웃이 영원한 을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