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옭맨 계약서 수두룩, 생존권 보장 요구 거세 … 제작자 ‘숙련도 미숙, 좋은 대우 어렵다’ 대립 팽팽

2000년도 한국영화 조수급 스태프들의 연평균 소득은 3백 37만원으로 나타났다.신생 제작사 네티스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준성씨(34). 충무로 생활 7년차였던 지난해 처음으로 1천만원이 넘는 연봉을 받았다. 6년 동안 그가 벌어들인 돈은 고작 1천8백50만원. 하루 14시간 노동을 밥먹듯이 했던 그가 일곱 작품 작업에 참여하면서 웬만한 샐러리맨의 1년 연봉에도 못 미치는 금액을 받아야 했던 이유가 도대체 뭘까.94년 청주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A작품의 제작부 막내로 영화 일을 시작했지만 당시 인건비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견습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던 그는 B작품에서는 제작차장으로 ‘승진’했지만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1백50만원 정도를 받았다. 곧 C작품의 제작부로 투입됐지만 그것마저 6개월 준비하다 기획 단계에서 엎어져 계약금 2백만원에 만족해야 했다. D작품은 제작실장을 맡아 1천만원을 받기로 했으나 제작사가 흥행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잔금 5백만원을 주지 않았다. E작품은 1년 가까이 매달렸지만 시나리오 판권이 타 제작사로 넘어가면서 그가 받은 것이라곤 보상금 1백만원이 전부였다.이러한 극도의 궁핍 상황은 비단 이준성 씨만이 겪은 상황은 아니다. <씨네21 designtimesp=21622>이 지난 5월 촬영조수협의회 창립 회원 1백10명을 상대로 벌인 간이 조사 결과만 해도 5년 경력의 촬영부 제2조수의 평균 연소득은 3백50만원(8년 경력의 경우 연 평균 소득은 7백50만원)에 불과했다. 올해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정범구 의원이 제시한 ‘한국 영화산업의 노동실태 조사’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0년도 한국영화 조수급 스태프들의 연평균 소득은 3백37만원으로 작업 시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 가입 경험이 없었다는 응답이 50%를 넘었으며 연소득이 1백만원 이하인 경우도 29.1%에 이르렀다.제작기간 연장·중단돼도 수당 지급 없어그렇다면 영화계 내부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지난 4월25일 대종상 시상식장의 피켓 시위를 계기로 급속하게 번져갔던 스태프들의 기본 생존권 보장 요구는 합리적인 수준의 표준계약서 마련에 모아졌다. 현재 통용되는 계약서는 “을은 본 영화의 제작완료 일까지 모든 기능 및 역할을 담당하고, 제공하며…관계법규 또는 불가항력적인 여건으로 갑이 본 영화를 제작할 수 없는 경우에 을은 계약금을 즉시 환불 또는 갑에 의해 타 작품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스태프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캐스팅이나 파이낸싱에 문제가 발생하는 등 제작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작품 제작이 미뤄지거나 중단될 경우, 그동안 스태프들이 제공한 노동이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조치는 현실적으로 없다.제작기간이 연장됐음에도 추가 수당 지급 등의 조항이 계약서에 없는 것도 문제다. 대부분 계약서에는 “갑은 촬영 기타 작업이 지연돼 작업기간이 연장되더라도 별도 합의가 없는 한 갑은 을에게 추가 보수를 지급하지 아니한다”고 못박고 있다. 반대로 을은 제작 기간 동안 갑의 서면 동의 없이는 제3자에게 스태프로서의 용역을 포함해 기타 어떠한 용역도 제공할 수 없다. 가계약을 맺어놓은 후속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전 작품의 제작기간이 늘어나 합류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촬영조수협의회 회원을 상대로 1명당 연 평균 작업편수가 1.5편 이하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공정한 영화환경을 위한’ 스태프들의 모임인 ‘비둘기 둥지’ 운영진인 김광호씨는 “표준계약제 실시는 우리 몫을 더 많이 달라는 요구라기 보다 한 성원으로서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한다.물론 제작자들의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한 제작자는 “최근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만 보더라도 카메라 포커스가 맞지 않은 장면이 한 두개가 아니다”며 조수급 스태프 인력들의 기술적 숙련도가 떨어짐을 문제삼는다. 숙련도가 보장되지 않는 스태프들에게 어떻게 좋은 대우를 해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인력 시장이 없고 또한 도제 시스템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제작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고 스태프들 내부에서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한 메이저 영화사의 제작자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질적 담보는 감독 개인에게 있었다”며 “제작기준이나 일시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표준계약제를 시행하면 프로듀서는 일정을 무리하게 진행해 작품의 전체 퀄리티가 떨어지며 오히려 이 시스템에 숙달되지 않은 스태프들의 고생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반박한다.그러나 스태프들은 이러한 제작자들의 논리가 ‘변명’일 뿐이라고 말한다. 촬영부의 한 스태프는 “촬영부 퍼스트 시절 1주일 동안 매일 버스에서 2시간씩 잠을 자며 촬영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포커스가 나갔다며 숙련도를 거론할 수 있느냐”라고 맞선다. 기술적인 숙련도가 떨어지는 데는 제작사가 무리한 일정을 강행한 결과이며 제작사가 오히려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짜 놓았다면 밤을 새워가며 촬영을 하거나 기간이 연장되는 일 등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스태프 처우 개선 문제에 앞장 서 온 김영철 촬영감독 역시 “스태프를 소모품으로 보는 제작자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 제작자는 필요에 의해 고용을 한 것이라면 설령 스태프들의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스태프는 소모품이란 인식 바꿔야제작자들과 스태프들의 상반된 논리는 현행 계약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스태프들의 제작사에 대한 요구 중 하나가 개별계약이다.(정범구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개별계약에 대한 스태프들의 선호도는 80%에 이른다) 이들의 주장은 ‘오야지’로 불리는 각 파트의 감독급이나 조감독 급이 대표로 계약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조수급 스태프들에게까지 적정한 수익 배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촬영 조명 등 각 부분의 조수급 스태프들이 계약 당사자인 이들을 상대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뒤 단일 안을 제작사에 요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지적한다. 한 프로듀서는 “개별 계약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태프들이 요구하는 적정 배분이 이뤄질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또한 스태프들의 조합이 없는 상황에서 개별 인력들에게 어느 정도 지불해야 하는지 기준이 없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이같은 대립항을 어떻게 풀 것인가. 방법은 있는가. 혹자에게는 이런 대립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공허한 논쟁처럼 보여질 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한국영화계가 산업화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제나 있어왔던 갑과 을의 대립이 아니라 현 ‘시스템’에 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금융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50억원이 넘는 프로젝트가 속출하고 매년 흥행 신기록이 경신되고 해외 배급이 활황세를 띠는 것 등이 한국영화 산업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경향이라면 이처럼 스태프들의 처우개선 등 제작환경을 개선하자는 요구가 터져 나오는 것 또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화의 길목에 들어선 한국영화계가 당연히 부딪쳐야 할 문제다.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제작자들을 중심으로 이미 영화인회의 등의 단체에서는 비둘기 둥지 등 스태프들 모임과 함께 제작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연구조사사업에 착수한 상태다. 직능별 임금조건과 계약조건 등 현 제작환경의 다양한 사례들을 수집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1월에 촬영에 들어가는 한 작품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시뮬레이션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으로 시작된 영화계 혁명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낼 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