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 아니 왜 몸만 왔어요?팀장 : 노조원들이 막는 바람에… (긁적 긁적) 일단 서류랑 짐은 그대로 놔두고 저만 왔습니다.”11월 둘째주, 서울 명동 국민은행 본점과 여의도 옛 주택은행 본점 건물에서 들을 수 있었던 대화다. 부서 통합 지시에 따라 이삿짐을 꾸리려는 팀장을 국민은행 노조원들이 저지하고 나서면서 일어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국민 노조원들은 왜 팀장의 이사를 막았을까. 사정은 이렇다. 합병은행 공식 출범 이틀전, 국민 노조측과 김정태 행장은 ‘명동 국민 본점을 합병은행의 본점으로 정한다’고 합의했다.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여 온 사안 하나를 전격 결정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식 합병일인 11월1일이 지나고 며칠후 국민 노조원들은 약속과 다르게 일이 진행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본점에 위치해야 할 행장실의 명동 이전은 미뤄지고, 반대로 주요 부서들이 자꾸 여의도로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장들의 이사를 일단 실력저지한 것. 주택은행측이 ‘은근슬쩍 대세 장악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국민측 노조원들의 불신과 불안감은 이처럼 뿌리가 깊어 쉽게 떨쳐지지 못한다.한편 요즘 합병 당사자인 국민과 주택은행의 임원들은 어느 때보다 말을 아끼고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일단 ‘합병호’가 닻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한 지금 쓸데없는 오해나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다. 수퍼은행 국민은행을 이끄는 김정태 행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같은 조심스런 행보는 대고객 전략에도 적용되고 있다.여의도 주택은행 본점은 간판을 국민은행으로 바꿔 달았지만 일반 영업지점들은 상호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국민이나 주택은행을 이용하는 고객 입장에서는 별 차이를 느낄 수가 없다. 양 은행간에 수수료 없이 송금을 할 수 있고 예적금 금리가 같다는 정도가 변화랄까. 지난 11월1일 합병일 공식 행사조차도 아주 조촐하게 진행됐다. 떡을 만들어 지점 방문 고객과 나눠 먹은 정도가 ‘잔치’의 전부였다. 지난 98년 한일-상업은행이 합병하면서 지점들이 일제히 ‘한빛은행’으로 간판을 싹 바꿔 달고 새얼굴으로 나타났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합병은 이제 5% 정도 진행됐다”는 한 임원의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협상을 벌이고 주식을 교환하고 은행 이름을 바꾸는 것은 합병 작업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진검 승부는 이제부터다. 합병호를 이끌고 가야 할 김정태 행장은 사실 고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골치아픈 건 다 끝났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까칠하다. 김행장을 비롯한 국민 주택 합병당사자들은 2년여에 걸쳐 합병 후 통합에 관련된 서적들을 모조리 탐독하고 경영 컨설팅을 받고 미국 등의 합병 은행들을 방문하며 또한 국내 합병은행의 사례들을 반면교사 삼아 참고해 왔다.흔히 경영컨설팅사인 AT커니의 용어를 빌어 ‘PMI’(합병 후 통합)라고 불리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김행장은 요즘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고민1 / 우린 너무 달라? 어떻게 한몸 만드나보람+하나 합병의 경험이 있는 김종열 하나은행 부행장은 해외 은행 합병 사례를 참고할 때 합병이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칙은 세가지라고 말한다. 첫째, 합병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가. 둘째, 어떤 경제적 가치의 증대를 바랄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목표 설정. 셋째, 기업 문화가 일치하는가.이중 합병 성공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문화와 인력 융합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역사가 짧은 보람 하나은행의 경우는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당시 종합기획부장으로 합병실무를 맡았던 하나은행 김부행장은 “보람이나 하나은행 모두 외부 인력을 영입해 만들어진 신생은행이었다”면서 “비빔밥과 비빔밥을 섞으면 비빔밥이니 문제될 게 없었다”고 말했다.그러나 각각 38년, 42년의 뿌리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국민과 주택은행은 사정이 다르다. 노조만 봐도 그렇다. 시장주의자 행장에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주택노조와 다소 강성이었던 국민 노조는 통합 후에도 이원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더구나 이번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된 국민 김병찬 위원장은 골수 합병 반대파로 알려진 인물이다.이같은 이질적인 기업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김행장의 숨겨둔 ‘비책’은 무엇일까. 의외로 답변은 ‘한몸뚱이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융화를 외쳐봐야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차별 경쟁으로 가는 것’이 김행장의 처방으로 해석된다. 한 임원의 표현에 따르면 ‘경쟁하다 보면 파벌이니 출신을 따질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는 융합이고 뭐고 단어나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선 살고 봐야 하니 저절로 뭉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 임원은 “성과주의에 중점을 두다 보면 문화 동질화는 자연스럽게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초대 합병은행장 취임사에서 김행장은 조직 내에 만연돼 있는 균등주의를 없애고 성과에 따라 보상받으며 능력에 따라 업무를 맡는 성과주의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평생 먹고 살 것을 마련하는 행원도 나오도록 하겠다’고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또 하나, 조직 융합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인사 문제다. 김행장은 인사 원칙에 대해 ‘도강 프로세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강을 건너면서 과거의 냄새와 흔적을 모두 없애고 새로 출발한다는 것. 그는 “앞으로 인사제도 통합이 이뤄지면 과거 인사기록을 모두 폐지하겠다”며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일단 인사와 관련한 민감한 부분은 다음해 3월 주총까지 유보돼 있는 상태다. 우선 합병은행 본부장 및 팀장 인사는 양쪽에 균등분배 형태를 취했지만 이는 과도 체제일 뿐이다. 김행장은 임원들의 능력을 파악하는 기간을 둔다며 고민을 덮어두고 있다. 본부장의 임기는 다음해 3월 주주총회 때까지. ‘김정태 인사’의 진수는 이때 드러나게 될 예정이다. 통합은행의 한 팀장은 “‘파벌도 없지만 외형적 균등을 강조하는 쿼터도 없다. 오직 능력에 따를 뿐’이라는 원칙 자체는 좋게 들린다. 그러나 이 원칙이 실현될 경우 분란을 피할 수 있을까”라고 심경을 털어놨다.고민2 /‘시장주의자’ 행장과 ‘버티기’ 행원그러나 이같은 융화를 위한 ‘비책’은 행원들의 반발에 부딪칠 공산이 크다. 우선 노조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미국에서 실적급제 도입으로 사실상 노조가 와해된 것처럼 직급에 따른 균등주의 보수체계는 노조의 최후의 보루와도 같기 때문이다.게다가 ‘은행원 생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질화된 집단이 은행원이다. 유난히 입행동기회가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도, 튀는 복장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런 성향을 알려준다. 심지어 김정태 행장이 98년 주택은행 행장으로 왔을 때 항간에는 ‘조직의 쓴 맛을 볼 것’이라는 둥 막말까지 나돌았다. 보수적인 분위기의 은행에서는 텃세가 심해 증권사 사장 출신의 행장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택은행의 변신을 성공시키고 결정적으로 주택은행의 주가를 띄움으로써 자본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화려한 주목을 받은 지금까지도 이같은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국민은행의 한 노조 간부는 “우리는 김정태 행장이 유능한 시장주의자인지는 몰라도 은행 조직과는 안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이같은 심정을 대변했다. 이 간부는 “김정태 행장이 주택은행 노조를 무력화시킨 전례가 있다”면서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 충분히 경계와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민3 / 클수록 좋다? 살 빼야 한다? 선택 기로합병 행장으로 선출되면서 김정태 행장은 ‘인원 감축은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는 “합병을 앞두고 언론과 끊임없이 접촉한 것도 이를 공언함으로써 양 은행 직원들의 불안감을 씻어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출범을 이틀 앞둔 10월30일 김병환 국민 노조위원장과 김행장은 합병 이후에도 국민은행 직원들 전원의 고용을 보장하고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하는 방안에 합의했다.게다가 합병의 기본이 비용줄이기라는 통념을 뒤집고 김행장은 오히려 “고객 접점을 현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려나간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는 주장을 편다. “펀드 하나를 팔아도 그 규모가 다른 시중은행과 비교가 안될 것이다. 영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시장을 선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줄여야 하느냐”는 논리다.하지만 이런 논리전개와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국민뿐 아니라 주택은행 직원들조차도 인원 감축이 없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국민 노조 간부는 “통합 초기를 넘기면 합의서의 문안을 교묘히 피해 인원 정리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외부의 시각도 비슷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남의 얘기라서 꺼려진다” 면서도 “1년여간은 조직 안정을 위해 실제로 감원이 없을 것이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회사 설립을 통해서나 그 밖의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인원감축은 않는다는 약속의 명분은 최대한 살리고 충격은 최소화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 감원을 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민4 / 고객 떨어져 나갈까 노심초사“뭐 합친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대로네요?” 11월3일 일산의 한 주택은행 지점서 만난 주부 고객은 이렇게 말했다. 속사정 복잡한 것과 관계없이 겉으로는 이처럼 조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초기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통합 국민은행의 전략이다.미국의 은행 합병 사례로 볼 때 두 은행이 합치면 통상 고객이 5% 이상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영업 모멘텀을 잃지 않는 것이 합병 초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당면과제. 그래서 영업점에서는 기존 ‘국민’과 ‘주택’간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김영일 부행장은 어느 지점을 가든 양쪽 은행 모든 지점에서 완전히 똑같은 업무를 볼 수 있게 되는 시점까지 브랜드를 그대로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이처럼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11월1일 합병 이후 양 은행의 고객 이탈은 거의 없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래서 ‘전략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모든 과제를 훗날로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다.김정태 행장 최근 행보전 직원들과 대화 “바쁘다 바빠”11월1일, 합병 국민은행이 공식 출범한 날을 전후해 김정태 행장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김행장은 할 말은 다 하고 이미 수차례 한 얘기까지 인내심 있게 되풀이 할 정도로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는 성향의 CEO.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너무 빡빡한 일정 탓에 그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요즘 민감한 시기임을 반영하듯 명동 국민은행과 여의도 주택은행 본점에는 어느 때보다 출입 통제가 철저하다.11월7일 기자가 행장실(여의도)을 찾았을 때도 김행장은 ‘이 회의에서 저 회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무얼 하느라 그렇게 바쁘냐”는 질문에 “보는 그대로, 이런 일로 바쁘지 뭐”라고 말하고, “요즘 제일 고민되는 게 무엇이냐”에는 “요새 고민, 하나도 없어. 이젠 열심히 일만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지친 탓인지 김행장의 얼굴은 최근 부쩍 피곤해 보였다.이번주부터 김행장은 전국 지점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만날 계획이다. ‘전 직원의 절반 이상과 직접 접촉한다’는 것이 목표. 한 관계자는 “국민은행 직원들은 김정태 행장이 무슨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라면서 “그러나 잠깐이라도 직접 만나보면 즉시 생각이 바뀐다”고 했다.김행장은 통합행장에 선임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시 출근 정시 퇴근 원칙을 지키려 하고 있다. 본래 ‘CEO가 하나부터 열까지 일을 다 챙기면 그 회사는 잘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해온 터. 주말이면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다만 하이닉스 문제와 같이 중요한 사안이 걸려 있을 때는 주말에 밭을 일구면서 내내 해결책을 궁리 또 궁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원들은 ‘이번에는 또 어떤 그림을 그려왔나’라면서 ‘주말 밭 구상’에 귀를 쫑긋 세우곤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