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 로버트슨(Julian Robertson, 사진)은 올해 70세로 한때 타이거펀드로 명성을 날렸던 헤지펀드 매니저다. 타이거펀드는 1인당 가입금액을 최소 5백만달러로 정했는데 98년 중반까지 18년 동안 연평균 32%의 수익률을 올렸다. 그러나 그후 계속된 실패로 환매 요청이 급증, 2000년 3월에 결국 펀드를 청산하고 말았다. 전성기에 2백60억달러까지 커졌으나 청산시에는 60억달러로 줄어 있었다.97년 타이거펀드 수익률 69%에 달해타이거펀드는 97년에 무려 69%의 수익률을 거뒀다. 98년에도 9월까지는 17%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엔화에 대한 공매도에서 18%의 손실을 입어 그해 연간 수익률은 마이너스 4%로 마감했다. 99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됐다. S&P500지수가 21%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펀드는 19%의 손실을 기록했다. 다음해인 2000년 1~2월에도 추가로 13.5%의 손실을 입어 청산에 이르게 됐다. 당시 폭등하던 기술주를 외면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90년 이후 20년간을 통틀어 보면 연평균 수익률이 25%로서 시장지수 상승률 17.5%를 크게 상회했다. 통상 헤지펀드의 운용수수료 1% 외에도 투자수익의 20%를 성과보수로 받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로버트슨은 이미 거부가 돼 있었다.그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펀드를 청산하게 된 배경을 당시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주의 광적인 폭등 탓으로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주가 폭등한 것은 단순히 투자자들의 기대 때문이다. 주가는 조만간 모래성처럼 붕괴될 것이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장에서 투자자들을 위험으로 몰고 갈 이유가 없다.” 비록 수익률 부진으로 펀드가 청산에 이르게 됐지만 예측대로 기술주의 주가는 폭락세로 돌변해 구겨진 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줬다.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복무한 후 증권회사에 취직해 20년간 주식브로커로 일했다. 그후 자산운용회사의 사장으로 몇 년 있다가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헤지펀드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귀국, 80년 운용회사를 차렸다.창업 초기부터 투자수익률이 화려했다. 운용 첫해인 81년에 시장지수는 5% 하락했으나 펀드는 24.3%의 수익률을 올렸다. 82년에도 수익률이 42.4%에 달했다. 89~90년에는 독일 주식을 사서 성공했고 이어서 일본 주식을 공매도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8백만달러로 시작한 펀드가 이 즈음에는 1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93년은 로버트슨에게 그야말로 환상적인 한 해였다. 37억달러 펀드의 수익률이 80%, 금액으로는 30억달러를 벌어 회사는 이중 20%인 6억달러를 성과보수로 받았다. 그는 이중 절반을 자기 몫으로 챙겼고 펀드의 25%가 개인투자분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번 돈을 포함하면 93년 한 해에만 무려 10억달러를 벌었다.그러나 펀드의 규모가 커지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미국내 주식뿐 아니라 전세계 주식과 거시경제변수(금리, 환율 등)에 베팅하기 시작한 것이고 두번째는 남부 출신의 급한 성격이 드러나서 내부적으로 직원들과의 갈등이 커졌다는 점이다.그는 94~95년 중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고 유럽 금리는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하고 베팅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다 그의 불같은 성격과 고집으로 유능한 직원들이 이탈하면서 타이거호는 침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줄리안 로버트슨의 종목선정 기준- 경영진이 유능할 것- 정부규제로부터 자유로울 것- 높은 성장성- 과거 수익기록이 양호할 것- 독과점 기업 선호- 성장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기업 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