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일까.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K사장, 토요일 오후 스산한 회사 건물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올해 나이 43세, 한창 일할 나이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바쁘기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회사일을 그만 둔 후에는 또다른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 평생 일만 하면서 취미도, 특기도 가꾸지 않은 중장년 세대가 퇴직 후 한꺼번에 늙어 버리는 모습을 그는 종종 목격했다. 재산이 꽤 있었던 사람임에도 계획없이 노년을 맞았다가 어려워지는 선배도 봤다.갑자기 묵직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깨닫는 게 있었다. ‘나는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구나’. 아이들 뒷바라지도 잘 해야 하고 취미와 특기,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재정적인 안정이 우선 확보돼야 한다.회계사 후배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야, 나 노후설계좀 해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한 후배.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FP’를 추천했다. “형, 미국식이긴 한데 체계적으로 은퇴 계획을 세우는 데는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그는 다음날 FP 협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현 재산과 부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미래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얘기했다.“65세 정도에 은퇴할 생각이고요, 서울 근교 전원주택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은퇴 후에는 매년 한 번 정도 해외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또 아이들은 유학 보내는 것까지 뒷바라지 할 생각이고, 결혼하면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해 줘야죠. 연금은 국민연금이 있지만 세금 낸 셈 치고 있습니다. 다른 연금은 별로 내키질 않네요. 지금 갖고 있는 저축과 종신보험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성질 급한 K사장과는 달리, 그의 말을 듣고 있던 FP는 차근 차근 질문을 했다. 구체적인 재산 상태는 어떤가, 은퇴 후에는 어떤 삶을 누리고 싶은가, 특별한 취미같은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비용이 필요한 취미인가, 그저 즐기고 쉬기만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기를 바라는가, 적은 보수를 받는 봉사나 순수한 자원봉사 등 어쨌든 사회활동을 할 생각은 없는가 등 평소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K사장은 두 시간이 넘도록 FP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자세한 재무 계획은 다시 상의하기로 했다. 그보다는 우선 생각해봐야 할 일들이 많았다. 예컨대, FP는 대부분의 부인들이 자식을 다 키워 놓으면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갖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K사장으로서는 상상도 못 해 본 생각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 은퇴 후의 삶에 대해 너무나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K사장이 FP로부터 받은 충고▷ K사장은 부채도 없고 재산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은퇴 시점인 65세 이후 예상 수입과 예상 지출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K사장은 막연히 ‘은퇴 후 45억원 정도의 재산이면 적당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은퇴 후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재산 목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녀 교육 등에 소요되는 비용을 적립해두는 부분을 제외하고라도 골프도 즐기고 사회적 체면도 유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경우 생활비로 필요한 금액은 달라진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재산 목표를 먼저 정한 뒤 이 목표치를 달성해 갈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매년 이를 검토하고 수정해야 한다.▷ K사장은 보험에 대한 인식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보험을 판매하는 친구 때문에 든 월 20만원짜리 종신보험과 10만원짜리 암보험으로는 보험보장 부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현재 총소득은 월 9백만원이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월 소득의 10배 가량이 적절한 보장 금액이라고 본다. 즉 K사장은 보험금이 10억원 가량 돼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월 40만원 가량 보험료를 내야 이 정도 수준의 보장을 받는다. K사장은 현재 보험 보장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이 몫을 늘릴 필요가 있다. 또한 보험은 상속용 절세 수단으로도 활용이 가능한 장점도 있다.▷ 은퇴 설계에 있어서는 건강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K사장은 이 부분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본인과 배우자, 자녀들의 건강 상태에 대해 점검을 한 다음 이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현재 벤처기업 대표이사이며 주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주식을 어떻게 할 계획인지, 현금화 할 것인지, 현금화해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인지 여부를 생각해봐야 한다.▷ 대부분의 40대는 상속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조건 ‘빨리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을 많이 벌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금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는 별로 추천할 만한 방법이 못된다. 세금을 줄이기 위한 준비에는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을 갖고 하나 하나씩 준비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보통 수준을 넘는 재산을 갖고 있는 K사장과는 달리, 평범한 직장인 P부장은 노후에 대해 더욱 대책이 없는 편이다. 그의 인생 목표에 따라 재무설계를 받아보면 은퇴 시점에는 자산이 마이너스 상태가 된다. 노후에 빚을 얻어서 살 수는 없는 일. P부장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수입과 지출로는 재무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는 목표를 다시 잡고 이에 맞춰 계획도 짜야 한다. (118~119쪽 참조)K사장의 은퇴재정 계획43세, 벤처기업 대표, 배우자와 2남1녀, 본인 소유 43평 방배동 현대아파트(시가 5억3천만원), 배우자 소유 32평형 성동구 옥수동 삼성아파트(시가 3억3천만원) 월세운용(60만원). 부채 없음. 은행예금 8억원, 주식 7억원(시세) 소유. 월수입 9백만원, 지출 5백만원.재무목표 수립·자녀 교육 : 대학원 석사 이상, 유학까지·자녀 결혼 : 소형 아파트 장만·65세 은퇴·매년 해외 부부여행·은퇴 후 전원생활 - 현재 거주 아파트 팔고 전원주택 구입·은퇴 시 자산 목표 : 유동자산 30억원, 부동산 15억원재무상태 분석·평가·자산상황 : 유동자산 15억원부동산 8억6천만원부채 없음·수입(세후)사업소득 1억80만원(월 8백40만원×12)임대소득 7백20만원(월 60만원×12)이자소득 7천5백만원(세후 수익률 5% 가정)·지출생활비 2천4백만원(월 2백만원×12)관리비 1천2백만원(월 10만원×12)교육비 3천6백만원(월 3백만원×12)P부장의 은퇴재정 계획45세. 중소기업 부장. 배우자와 2자녀. 본인 소유 영등포구 당산동 아파트(시가 2억원). 은행대출 7천만원. 은행예금 2천만원. 월수입 4백만원. 지출 4백만원.재무목표 수립·자녀 교육 : 4년제 대학 졸업까지·결혼 : 각 5천만원씩 지원·현 직장 정년 55세, 65세 은퇴·매년 부부해외여행·은퇴 후 서울근교 전원주택서 생활·은퇴시 자산 목표 : 유동자산 2억원. 부동산 3억원재무상태 분석·평가·자산상황 : 유동자산 2천만원부동산 2억원부채 7천만원·수입(세후)사업소득 6천만원(월 5백만원×12)·지출(저축, 연금 제외)생활비 등 3천1백20만원(월 2백60만원×12)교육비 1천8백만원(월 1백50만원×12)보험료 2백40만원(월 20만원×12)대출원리금 상환 1천2백60만원계 6천4백20만원재무계획 수립·자녀 교육자금 6천5백27만원·자녀 결혼자금 8천3백63만원·은퇴 후 필요자금 추산 6억7천70만원●도움말 : 이준승 카디프 보험 부장, 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 김영삼 굿모닝증권 PB팀장, 이왕범 유니에셋 이사, 이장건 하나은행 세무사.은퇴 설계, 누구에게 도움 받을까FP 노크하면 노후대책 ‘똑소리’FP(Finanacial Planner)는 은퇴 설계 전문가라기보다는 재무설계 전문가다. 하지만 단순히 지금 갖고 있는 재산을 관리해 준다기보다는 평생 재무설계를 도와준다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있기 때문에 은퇴 재정설계에 도움을 받기에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본래 미국서 보편화된 제도로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처음 도입됐다. 현재 은행 증권 보험 등 여러 금융사에 1천여명의 AFPK자격증(FP 1단계에 해당)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본격적인 FP라 할 수 있는 CFP(FP 2단계에 해당)는 아직 국내에서 교육이 시작되지 않았다. 국내 CFP는 내년에나 배출될 전망. 미국서 이 자격증을 취득해 갖고 있는 사람은 현재 우리나라에 다섯명 쯤 있다고 한다.한국 FP협회 임계희 본부장(사진)은 “과거에는 재테크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저금리인 데다 위험도 높아졌고 투자기법이 다양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재산 관리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인생 설계에 맞춘 재무설계를 하고, 한 번 만든 계획은 계속 모니터해서 수정 보완해 간다는 것. 임본부장은 “FP는 보험 연금 투자 부동산 세무 등 각 분야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 알면서 필요할 때는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코디네이터로써의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FP들은 매뉴얼에 따라 6단계를 거쳐서 파이낸셜 어드바이스를 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래서 “과학적인 관리, 평생관리”라는 게 임본부장의 설명. 그는 “대개의 고객들은 막연한 계획만을 갖고 있다”면서 “이같은 목표를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FP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자산 관리는 돈 많은 사람들이나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임본부장은 “FP의 관리는 종합 관리다. 부채가 많은 사람이라면 부채 관리를, 또 자산이 적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늘릴 것인가를 관리하기 때문에 FP와의 상담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