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들의 진출은 IMF 유동성 위기와 함께 두드러졌다. 대마불사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국내 금융기관들은 차례로 외국자본에 손을 내밀면서 수치감을 맛보아야 했다.제일은행이 그랬다. 사내 방송용으로 제작된 ‘눈물의 비디오’는 공중파를 타고 상처 어린 국민의 눈시울을 다시 한 번 붉히게 했다. 뉴브리지캐피탈이 인수한 제일은행은 외국계 은행으로 분류됐고 윌프레드 호리에씨가 행장으로 들어앉았다. 국내 가전, 반도체 기업 등도 외국기업에 경영권을 내주며 외국자본 유치 극대화에 주력했다. 광화문 앞에 우뚝 솟은 파이낸스센터는 매킨지컴퍼니 메릴린치 EDS 등 외국기업으로 가득 차게 됐다. 아래 표에서 보듯 98년 4천7백46개 업체에 불과하던 주한외국기업은 올 6월 1만7백여개(외국인 투자 지분 10% 이상)로 급격히 증가했다.외국기업의 진출은 국내 기업활동의 긍정적인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JP모건, 웨벅딜리옹리드 등을 포함한 외국인 투자가들은 증권 기사의 머리를 장식했고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기업 경영 표준)’라는 용어를 국내 기업환경에 각인시켜 줬다. 특히 IT기업과 금융기업들은 국내 경제활동의 인프라를 장악하면서 핵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제일은행은 투명한 운영과 결단력 있는 경영권 행사로 화제를 낳았다. 호리에 전임 제일은행 행장은 관치 경영에 강력한 노(No)를 선언하는가 싶더니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한 투자 실패를 책임지고 행장직을 훌훌 벗어 던졌다. 은행 경영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며 국내 기업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국내 산업 활력소 … ‘고용사장’ 부담 만만찮아한국HP는 여의도의 고려증권 사옥을 인수하며 한국에 대한 투자약속을 지켰으며 미 본사가 삼보컴퓨터로부터 대량의 컴퓨터를 구매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했다. 삼보컴퓨터는 HP가 구세주인 셈이다.IMF위기 이후 4년을 지나면서 외국기업들의 역할과 비중은 국내 산업의 핵심을 차지하고 운명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됐다. 자연스럽게 외국기업의 CEO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외국기업의 CEO라고 해서 국내기업 CEO와 다른 것은 아니다. 기업을 소유한 오너가 아니어서 호리에 전 제일은행장처럼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권한과 책임이 분명해 오히려 부담이 가중되는 면도 있다. 외국기업의 대표는 투명 경영이라는 명제 앞에 항상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HP사장실은 출입문이 없는 개방형 구조다. 임직원에 비해 큰 방도 아니다. 본사 규정에 따라 사무실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문이 없는 개방형 사무실은 한국HP의 투명경영의 상징인 셈이다. 다카스키 노부야 한국후지제록스 회장은 한국 지사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총자산이익률(ROA) 그래프를 보여줬다. 그는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란 경영이 투명해야 하고 오너와 직원이 같은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화려한 것 같은 외국기업 CEO의 자리는 늘 불안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용 대표이기 때문이다. 외국기업의 CEO는 국내 이사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사의 결정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 라인오브코맨드(LOC, 명령체계)가 본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면 그나마 LOC가 짧아 업무가 수월하다. 그런데 리전(지역 본사)이라고 해서 싱가포르 홍콩 일본 등에 있는 지역 본사의 우산아래 있을 경우 지역본사→본사를 거쳐야하는 불편이 있다.어쨌든 대부분의 외국기업 CEO들은 본사의 추상 같은 인사에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어찌보면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올해 초 미국 IT전문업체인 노벨이 국내 사업철수를 전격 선언하고 사무실을 닫았다. CEO는 물론 출근과 동시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됐고 가방을 싸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본사 차원의 기업인수 합병에 따라 국내 지사도 하루 아침에 통합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글로벌 단위의 전략적 제휴 및 기업 인수합병이 확산되면서 국내 지사에도 불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99년 컴팩이 디지털을 인수하자 국내 조직도 이에 따라야 했다. 미 본사가 합병을 선언한 HP와 컴팩의 한국지사도 이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국HP 사장과 컴팩코리아 사장 중 하나는 대표직을 그대로 수행하겠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한국 기업문화의 특성상 CEO가 물러나는 기업의 직원들이 사실상 정리해고의 대상이 된다. 제약업체 글락소웰컴과 스미스클라인비첨은 올해 초 합병하면서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을 새로 출범시켰다. 스미스클라인비첨 사장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직원수와 매출 규모에서 훨씬 컸던 글락소웰컴코리아의 사장이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사장으로 발탁됐기 때문이다.결국 외국기업 CEO는 매출과 실적으로 살아가는 컨츄리매니저(지역담당자)라는 양면성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외국기업 CEO는 큐(Q)살이를 하며 철저하게 실적을 챙긴다. Q살이는 쿼터매지니먼트(Quarter Management)의 한국식 조어. 3개월 단위 분기별 실적을 제대로 달성해야 본사에 당당하게 보고하고 예산을 받는다. CEO의 분기별 실적표인 셈이다.이같은 배경 때문에 외국기업 CEO들은 언제 어디서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실력과 경력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기술지식, 금융지식, 영업능력, 인간관계, 건강 등 즉 본인의 상품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니고 있다. 본사의 러브콜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