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이 대형화되는 건 이제 막을 수 없는 추세다. 국민은행처럼 총자산이 200조원대를 바라보는 은행이 또 나올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덩치는 계속 커질 전망이다. 은행이 커지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공공성’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익성’을 최대의 목표로 삼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실제로 2001년 국내은행은 5조원이 넘는 수익을 올려 3년 전에 비하면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경영성적표가 좋다. 2002년 말에는 은행들의 이익이 10조원이 넘을 것으로 금융당국은 보고 있다. 앞으로 은행의 덩치가 커지고 수익 규모가 평균 조 단위를 넘게 되면 과연 고객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올까? 고객입장에서 본 은행대형화의 명암을 가상으로 그려본다.명 / 유리한 사람은 더 유리해진다앉아서 대출금을!2004년 1월, 평범한 샐러리맨인 한고객씨는 대출서류를 들고 찾아온 은행직원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대출관련 서류를 만들어 창구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이젠 대출을 해주러 은행직원이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이다.가만히 앉아 인감을 찍고 사인을 하니 계좌로 대출금 1억원을 송금해 주겠다고 직원은 설명했다.“아파트 담보대출은 이제 정형화돼 있어 서류도 간단한 편이죠. 굳이 지점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음 은행에서 나온 직원은 이렇게 말하며 물어보지 않은 말도 덧붙였다. “아파트 담보대출은 위험도는 거의 없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출상품입니다. 그래서 예전 자동차 세일즈맨처럼 발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합니다.”이젠 은행들이 예전처럼 예금모집을 잘 하는 직원보다는 대출을 잘해 오는 직원들에게 인사고과상 가점을 주는 세상이 됐다. 이 모든 것이 은행이 대형화되다 보니 일어난 변화다. 수신고 걱정은 이제 하지 않고 대출, 즉 수익창출에 더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은행의 경영방향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몇 남지 않은 시중은행들이 모두 주택금융 영업부를 신설했거나 확충했다. 그러다 보니 한씨처럼 거액대출을 한 고객은 예전의 거액 예금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창구에서 각종 금융업무를 …한고객씨는 홈트레이딩 시스템으로 주식을 판 뒤 매도대금을 찾으러 한마음은행 창구에 간 김에 연금보험을 새로 가입했다. 예전 같으면 은행, 증권사, 보험사를 따로 찾아서 거래를 해야 했지만 한 창구에서 모든 업무가 가능한 이른바 일괄 은행업무(one-stop banking)가 이미 일반화됐다.그런데 보험을 가입하려던 한고객씨는 창구직원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창구의 텔러 아가씨가 “선생님은 저희 은행과 여러 금융거래를 오래 한 덕에 신용도가 올랐습니다. 따라서 보험료를 월 1% 더 할인받을 수 있게 됐네요”라고 설명한 것이다. 한고객씨는 오래 전부터 한마음은행과 거래했다. 급여이체도 돌려놨고, 전기료·전화요금 등도 한마음은행 통장에서 빠져나가게 해놓았다. 신용카드도 한마음은행 BC카드를 주로 사용한 것이다. 한고객씨는 일찍부터 ‘주거래은행’을 정하고 거래해온 셈이다.은행이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기 위해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한 이후 한고객씨는 거래를 집중했는데 이제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은행 여직원은 “이제 월납입금 20만원짜리 보험에 가입하셨으니 이미 받으신 은행 대출금리도 0.2%포인트 정도는 더 떨어지겠네요”라고 알려줬다. 한씨는 은행의 대형화로 이룩된 네트워크의 혜택을 듬뿍 느끼며 은행문을 나섰다.암 / 철저한 차별화로 고객관리‘수익제일주의’로 창구부터 변화한고객씨가 아파트를 소유한 터에 편리하게 대출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아직 전세를 못 벗어난 나서민씨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상황이 나빠졌다. 연봉수준도 낮은 편인 나씨는 은행 문턱이 백두산만큼이나 높게 느껴진다. 어렵게 받은 대출금 2,000만원의 이자도 10%를 넘어선다. 나씨는 은행이 ‘공공기관’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은행 입장은 다르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행이 수익제일주의로 돌아간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아요?”한마음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나씨가 느끼는 감정은 한겨울이다. 신용카드 대금을 연체시킨 경험이 있는 나씨의 대출금리는 그만큼 더 올라간 것이다. 하기야 다른 은행에서는 10만원 이하의 예금에 대해서는 이자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벌금까지 내라는 판국이니 이 은행이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정부가 지난 1998년 은행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선진국 수준으로 은행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한 지 6년 만에 결실을 봤다. 수시로 구조조정을 겪은 은행원들이 이제 노골적으로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을 안 해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1인당 생산성은 선진국 수준인 연간 순익기여도 2억원을 넘어선 상태다. 나서민씨는 아직 인터넷뱅킹도 개설하지 않은 터여서 지점에 거래를 하러 올 때마다 직원들이 짜증내는 걸 느낄 수 있다.기다리는 사람이 늘 20∼30명씩 되는데다 창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실제로 은행이 직원을 줄이고 있기도 하지만, 일반창구가 없어지고 거액예금자를 위한 높은 칸막이가 늘어나면서 직원을 통해 입출금 거래를 하려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만 한다.각종 수수료 비싸져나서민씨는 할 수 없이 좀 부담스럽지만 현금카드로 돈을 찾으려고 발걸음을 돌렸다. 예전에는 은행영업시간 이후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사용할 때만 수수료를 물었지만, 이젠 근무시간 중에 ATM을 써도 건당 500원 이상 수수료를 내야 한다. 은행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예대마진(예금과 대출금리 차이)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모든 거래에 수수료를 물리고 있다는 게 은행측의 설명이지만 나씨는 왠지 씁쓸하다.예전에 은행이 10개 이상 있던 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은행이 줄줄이 합병해서 큰 은행으로 된 뒤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머니를 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부가 ‘은행 수수료 현실화’를 인정한 이후 수수료를 부과하는 항목도 늘었지만 금액도 꽤 올랐다.수표를 바꾸려면 최소 1,000원 이상 수수료를 떼간다. 이제 은행 직원을 통한 모든 거래는 기본적으로 몇천 원의 수수료가 들어가는 것 같다. 나씨는 “빨리 인터넷뱅킹 계좌를 트시는 게 수수료 절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은행직원의 충고를 들었지만 인터넷뱅킹이 더 확산되면 관련 수수료를 또 올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지금까지 은행들이 새로운 방식에 고객들을 ‘길들인’ 다음에는 꼭 수수료를 올리곤 했다는 걸 돌이켜보면 나씨의 이런 걱정이 괜한 기우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