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국제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일본경제와 엔화 가치 향방’이다.관심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에 모아진다. 하나는 지난해 3월에 이어 다시 나돌고 있는 ‘3월 또는 고이즈미 위기설이 가시화될 것인가’ 여부와 다른 하나는 ‘일본경제는 언제 회복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최근 나돌고 있는 3월 또는 고이즈미 위기설의 실체는 이렇다. 현재 예상으로는 3월 말 회계연도 결산을 앞둔 일본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실적이 전후(戰後) 최악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정이 현실화될 경우 닛케이 지수는 1만선이 붕괴되면서 대부분 일본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유동성 부족문제에 몰릴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문제는 일본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이 유동성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빌려준 엔화 자금을 회수할 경우 유동성 부족문제가 아시아 국가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또 한 차례 혼란을 겪게 된다는 시나리오다.현재 일본 정부는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엔저를 용인하고 인플레 정책을 골자로 한 긴급 경기부양 대책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주로 미시적 정책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전해짐으로써 침체상태에 빠진 증시와 경제를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그렇다면 일본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땅에 떨어진 일본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런 점에서 고이즈미 현 총리에 대한 저항세력들의 움직임과 함께 연합정당은 공명당과 보수당도 파트너 관계에 균열된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한때 85%에 이르렀던 일본 국민들의 지지도도 크게 떨어지고 있는 상태다.경제적으로는 국민소득(GDP) 기여도의 약 66%를 차지하고 있는 민간소비가 회복되는지가 관건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 국민들은 유동성 함정에 빠져 금리인하와 같은 어떤 신호를 준다 하더라도 소비가 좀처럼 늘지 않고 오히려 소득이 발생하면 저축해 경기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저축의 역설).더욱이 일본은 지난 1993년 하반기 이후 17차례에 걸친 10조엔 이상의 대대적인 경기부양 대책으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GDP의 각각 11%, 132%에 이르고 있어 재정정책 면에서도 여유가 없다. 금리도 콜금리의 경우 ‘제로’ 수준이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내릴 여지가 없는 상태다.앞으로 일본경제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아시아 지역에서는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그중에서도 엔화 가치가 급속히 떨어질 가능성에 가장 유념해야 한다. 이미 일본 자체적으로는 경기부양 차원에서 엔화 약세를 용인한 상태다. 올해 들어서도 게이단렌(徑團連), 재무부 등이 잇달아 엔저를 용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구조개혁이란 단서를 달고 있으나 IMF와 미국도 엔저를 용인하는 의사를 표명한 것은 일본경제의 독특한 위상 때문이다. 비록 일본경제가 세계총소득에서 9%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경제의 완충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에 일본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미국과 세계경제도 안정될 수 없는 점이 감안된 것으로 풀이된다.국제통화질서에서도 미 달러화와 유로화가 부각되고 있고 아시아 경제의 중심축이 중국으로 바뀌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엔화에 대한 보유심리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상태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엔화 가치는 앞으로 상당기간 기조적으로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그렇다면 역(逆) 플라자 체제가 다시 재현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95년 4월 역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은 무역적자 부담이 적었고 국제적으로 멕시코 사태에 따라 폭락했던 달러화 가치가 세계경제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 회복돼야 한다는 데 국제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이에 비해 현 시점에서 일본경제 안정을 위한 엔저 대책은 별다른 이득이 없는 상태다. 당사자인 일본은 최근처럼 금리가 낮은 상태에서 엔저는 수출증대 효과보다는 일본내 자금이탈에 따른 경기침체효과가 더 커 보인다(역자산 효과). 바로 이 점이 최근에 나돌고 있는 위기설의 핵심이다. 모든 부양수단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엔저가 될 경우 미국도 추가적인 무역적자 부담을 안아야 한다. 특히 일본경제에 ‘안항적(雁行的) 경제구조에다 엔·달러 환율의 천수답(天水畓) 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엔저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자국통화의 평가절하가 불가피해 통화마찰까지 우려된다.이미 올해 들어 아시아 국가간의 통화마찰이 불거지고 있다. 최근에 엔·달러 환율이 130엔대로 오르자 경쟁력 약화를 우려한 중국이 엔화를 대거 매입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자국통화의 가치하락을 용인하기 시작했다.결국 이번에는 미국과 IMF가 엔저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역플라자 시대처럼 엔·달러 환율이 크게 상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엔저를 통해 일본경제와 세계경제를 안정시키려는 방안이 악수(惡手)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120∼130엔대의 엔저 기조는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무엇보다 수출에 미치는 타격이다. 제2 또는 제3교역국으로서 일본경제 침체와 여전히 엔·달러 환율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대일 수출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일부 정책 당국자를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수입선이 한국으로 바뀔 경우 반사적 이익을 기대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낙관적인 시각이 올들어 원·엔 환율이 2년 6개월 만에 988원으로 떨어져 수출업체에게 타격을 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일본 금융기관들의 대출회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현재 금융감독위원회에서는 일본 금융기관들의 대출규모가 40∼50억달러인 점을 들어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대금업을 통한 엔화 차입분 등을 감안하면 의외로 자금의 규모가 클 가능성이 높다.지난 1997년 11월 이후에도 일본 금융기관들은 당시 한국 정부가 파악한 규모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미국과 유럽계 자금보다 앞서 회수에 들어감으로써 외환위기를 낳게 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일이 있다.중·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간자 또는 균형자적인 위치를 잘 활용해 현재 이 지역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무역지대(FTA) 구상과 공동통화기금 창설, 공동화폐 도입을 성사시켜야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외부환경에 흔들림 없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이런 점을 감안할 때 현 시점에서 정책당국자의 섣부른 낙관론보다 신중한 자세가 곱게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