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에서 바라본 메디슨무리한 투자 ‘화근’ … ‘대우’ 닮은꼴메디슨 부도를 놓고 벤처업계에선 ‘벤처 연방제’의 꿈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대우가 패망에 빗대어 메디슨을 꼬집는 지적도 있다. 이민화 전회장(49)이 이끄는 메디슨사단 역시 대우처럼 무리한 확장으로 인한 유동성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이 전회장은 “주가 거품에 도취해 빚을 많이 얻어 쓴 것이 패인이다. 벤처인들에게 면목이 없다”고 일간지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토로했다. 이 전회장을 바라보는 벤처인의 눈길은 동정 반 자괴감 반이다. 누구보다도 몸바쳐 일한 벤처인의 몰락치고는 너무 허무하기 때문. 이와 함께 업계에선 “메디슨에 올 것이 왔구나”라며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이는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이 전회장의 독선은 2000년말 열린 메디슨의 기업설명회에도 나타났다. 당시 행사장에서 애널리스트들은 메디슨의 수익성 악화와 투자 부실화, 현금 흐름의 불안정성 등을 제기했으나 이 전회장은 “잘 되고 있는데 왜 몰라주느냐”며 오히려 장밋빛 전망을 강권했다. 한 벤처기업인은 심지어 “함께 일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이회장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하니 회장의 무리수에 제동을 걸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이 전회장이 강조해온 벤처연방은 ‘벤처업계의 대우’, ‘벤처재벌’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전회장은 이를 ‘관련 다각화’란 합리화로 일축해 왔다. 지난해 무한기술투자 지분매각 후엔 경영권 분쟁으로 웰컴기술금융에서 280억원의 소송을 걸기까지 했다. 메디슨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그랬고 불과 몇 달 전 대표이사 사임 직후에도 연방의 조율자로 남겠다고 공언해 왔다.벤처업계에 ‘타산지석’ 삼아야메디슨의 위기는 99년부터 조짐이 있었다. 초음파진단기 신제품을 내놓지 못한데다 영업마저 제대로 안 되면서 현금 흐름에 이상신호가 나타난 것. 2000년 1·4분기 매출은 197억원에 머물렀다. 부실의 신호가 왔을 때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지만 결국 시기를 놓쳤다. 25개 계열사와 40여개에 달하는 투자회사에 대한 자금부담이 유동성 위기로 연결되면서 극도의 자금압박을 받았다. 벤처캐피털이 본업이 아닌데도 차입금을 늘리며 메디다스, 한글과컴퓨터, 메리디안, 비트컴퓨터 등 40여개 벤처기업에 800억원을 투자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무분별한 확장’과 ‘재벌흉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그는 유동성 문제를 정치적인 벤처연방제로 해결하려고 했다. 평화은행인수도 벤처연방제의 일환이었다.이미 오래 전부터 메디슨이 경영난에 처해있다는 소문이 있어 왔던 터라 벤처기업의 자금줄이 막히는 등의 우려는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메디슨의 붕괴가 벤처기업인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은 “메디슨의 붕괴는 벤처 대부로 불렸던 이 전회장의 붕괴”라며 “또 한 명의 ‘스타 벤처기업인’을 잃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조사장은 “이것이 벤처창업 열기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권오용 KTB네트워크 상무는 “메디슨의 부도는 재무구조의 건전성보다 불확실한 수익성만을 추구한 결과”라며 “이런 의미에서 (메디슨의 부도는) 벤처기업인들에게 타산지석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유용호 벤처기업협회 사무국장은 “벤처의 상징이 무너졌다는 심리적인 타격이 오래 갈 것”으로 내다봤다.증시에서 바라본 메디슨96년 상장 후 본업보단 부업에 골몰“메디슨 부도는 예견된 일이었다.”지난 1월 29일 메디슨이 최종부도처리된 뒤 한 시장관계자가 내뱉은 말이다.메디슨은 지난 85년 이민화 전회장이 대학원을 갓 졸업하면서 설립한 회사다. 메디슨이 구멍가게 수준의 벤처기업에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지난 96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부터. 이 전회장은 95년말 거래소 상장을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기업공개 업무는 증권감독원의 고유권한이었기에 이회장은 관계자들을 총동원해 증감원을 압박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메디슨의 재무구조가 상장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96년부터 상장기업 수를 줄이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이회장은 필사적으로 메디슨의 상장신청서를 앞 순서에 놓기 위해 뛰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95년 12월 마지막 증권관리위원회에 메디슨의 상장안건이 통과돼 96년 1월 거래소에 상장된다. 당시 서류심사 순서를 앞당기기 위한 로비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96년 B증감원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당시 실무를 맡았던 금융감독원의 한 국장은 “‘높은 곳’은 물론 심지어는 기자들한테서도 ‘메디슨의 서류심사가 12월 안에 가능하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며 “말이 ‘문의’지, 사실상 압력이었다”고 회고했다. 메디슨은 96년 상장으로 목돈을 쥐었고 이 를 발판으로 사업다각화와 확장을 꾀했다.이후 메디슨과 이회장은 문민정부 시절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현철씨가 밀어줬다는 소문에 휘말리는가 하면 제품 수준과 관련된 소송도 당하지만, 위기를 잘 넘기고 98년부터 불어닥친 벤처붐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뉴스메이커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때부터 본업보다는 재테크에 골몰했다는 것이다. 메디슨은 98년 한컴주식 매입을 시작으로 ‘벤처업체’가 아닌 ‘벤처투자자’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무리하게 차입금을 통한 투자에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빚을 내 메리디안, 메디페이스 등 40여개 기업에 투자해 한때 평가이익을 올리기도 했지만 2000년 중반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모두 부담으로 돌아왔다. 메디슨의 재무제표를 보면 본업보다는 부업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주식시장 후 폭풍 우려99년 5,600억원대에 달했던 자본총계가 2000년 859억, 2001년에는 570억원대로 급격하게 감소한 데 이어 당기순익이 523억원 흑자에서 1,166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98년을 기점으로 영업이익률이 급속도로 줄었다. 98년 24.3%였던 영업이익률은 2000년 3%로 떨어졌다. 100원어치 물건을 팔아 24원 이익을 남기던 것이 3원밖에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이에 비해 99년 50.3%에 불과하던 부채비율은 2000년 418%, 2001년 상반기에는 650%를 넘었다. 차입금 구조도 만기가 1년 이내인 단기차입금이 장기차입금의 3배에 이르는 등 재무제표에 이미 위험신호가 켜졌던 것이다.메디슨은 재무구조상의 위기를 한컴주식 매각과 계열사 매각으로 벌충하려 했지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별 도움을 얻지 못했다. 지난 연말 오스트리아 현지법인 크레츠테크닉 매각대금도 회사측에 지급해야 할 돈을 상계하고 나니 당초 예상했던 1,5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650억원에 불과했다.한편 메디슨의 부도로 주식시장에도 한 차례 더 폭풍이 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코스닥보다 진입조건이 까다로운 거래소시장에 상장돼 있었던 메디슨도 부도가 나는 마당에 코스닥시장의 벤처기업들은 과연 이상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곧잘 자금악화설에 휩싸였던 일부 코스닥 간판기업들을 보는 시장의 시선은 냉랭해지고 있다. 시장관계자들은 메디슨의 부도로 코스닥기업의 구조조정이 가속화되고, 일부 기업은 M&A(합병인수) 시장에 매물로 대거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돋보기 이민화는 누구‘천당’과 ‘지옥’ 오간 실패한 벤처대부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49)은 지난85년 벤처기업 메디슨을 설립하기전까지만 해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국책연구과제와 씨름하던 수재 과학도였다. 그는 “연구개발에 너무 소극적인 국내기업을 보고 있자니 분통터져 못참겠다”며 20~30대 연구원들과 과기원을 뛰쳐나와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창업초기 사흘동안 한숨도 안자며 연구에 몰두, 제품 개발을 끝내고야 잠들곤 했다고 한다.그는 또 ‘금품질, 은가격’ 원칙을 고수, 최고품질이면서 같은 무게의 은보다 높은 가격을 받자는 경영전략을 양보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결재과정이 복잡한 회사는 망한다”고 믿어 결재란을 ‘제안자­검토자­결정자’ 세칸만 만들어 결재시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등 기업경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이같은 이전회장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벤처기업의 개척자로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다. 그는 좀체 힘들 것 같았던 초음파진단기를 국산화시켜 수출까지 해 메디슨은 86년 5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88년 30억원, 90년 73억원, 92년 226억원(수출110억원포함)으로 급성장했다.이 전회장은 문민정부시절인 95년 벤처기업협회를 만들어 젊은 벤처기업인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 96년엔 당시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로부터 ‘우리시대의 영웅’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대표는 당시 국회 대표연설에서 중소기업의 모험 정신을 강조하면서 85년 초음파진단기를 개발, 사업화한 이전회장을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영웅’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하지만 이대표의 발언은 이전회장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이대표의 발언이 있은 직후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측이 “메디슨은 1백억원의 특혜대출을 받는 등 ‘권력핵심부’ 인사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해 이전회장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권력핵심부 인사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를 지칭한 것이었다.이전회장은 현정부에 들어서도 잘나가는 벤처기업인이었다. 이전회장은 지난98년 대통령소속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이듬해엔 사법개혁추진위원까지 맡았다.하지만 이제 이전회장은 한때 재산이 400억원대에 달하는 ‘벤처업계의 대부’에서 빚만 6억원을 떠안은 ‘실패한 벤처인’으로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