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서 예금을 받고, 이 기업 저 기업에 은총이라도 내리듯 돈을 나눠주던 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은행들은 한푼이라도 더 이익을 남겨줄 고객을 빼앗아오기 위해 증권사, 신용금고, 카드회사, 심지어는 고금리 사채업자들과도 아귀다툼을 벌인다.그래서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은행 문화도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철저한 연공 서열 중심의 조직 문화는 이는 은행에서 ‘행원’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행장과 임원 등 몇몇 경영자들을 제외하곤 한결같이 ‘입행 OO기’로 불리는 은행원 출신이었다.상황이 변했으니 어디 은행서 할 일이 돈세는 것뿐이랴. 마케팅도 해야 하고, 예전엔 잘 하지 않던 복잡한 파생상품 거래도, IT 투자도 해야 한다. 공채로 선발된 신입 행원들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내부에서 훈련시켜 배치하려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의 표현대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은행원’들만 데리고는 장사를 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그래서 은행들은 ‘외부 전문가’라는 묘한 이름을 붙여 밖에서 사람을 구하게 됐다. 이런 인력 스카우트는 서서히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전산본부나 리스크 관리와 같이 최근 새로 생겨나는 조직은 대개 밖에서 사람을 구해오는 게 일반적이다.조흥은행은 최근 ‘PB(프라이빗 뱅킹)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새로 PB부서를 만들면서, 부서장을 필두로 이 분야 전문가를 대거 바깥에서 구하고 있다.외환은행은 아예 증권사에서 기업어음 중개 전문가들을 팀 단위로 스카우트해 오기도 했는데, 이들이 내는 성과에 대해 매우 만족하는 분위기다. 또 최근 너도나도 카드영업 강화에 나서면서 은행간에 카드 마케팅 전문가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바깥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노조의 반발도 심하고, 워낙 견고한 조직 문화를 유지해 오다 보니 융합도 어렵다. 더구나 외부 인력을 데려오려면 파격적인 보수를 제시하는 수밖에 없는데, 다른 행원들의 반발을 의식해 이 ‘외부 전문가’들에게 제대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심지어는 이들에게 어떤 직급을 붙여주는가도 고민이다. 일부 은행들은 대리나 과장 등의 확실한 직급을 피해, ‘팀장’ 등 위치가 불분명한 호칭을 붙여주는 고육책을 쓰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자는 “예전만큼 밖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민감해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과도기를 넘어서먼 행원 출신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될 것이다. 그만큼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이수용 하나은행 신탁사업본부 팀장보험사 경험 토대 퇴직신탁 1위에 올려“그 사람이 팀 분위기를 확 바꿔버리더라니까요” 경쟁 은행 신탁팀 관계자는 하나은행 이수용 팀장 얘기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팀장은 보험사에 근무하다 은행으로 옮긴 매우 드문 경우다.그는 이전에 보험사에서 계리인으로 일했다. 계리인은 통계와 각종 수치 등을 조합해 보험 상품을 개발하고, 보험요율을 정하는 사람이다. 상품개발을 하면서 퇴직보험 영업도 겸하곤 했다.2000년 은행서도 퇴직신탁을 팔 수 있게 되면서 보험권과 은행권이 함께 상품을 개발하고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협의체를 구성했다. 그는 이때 협의체에 참여했던 인연으로 은행에 오게 됐다. 은행측에서는 보험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 처음 도전하는 만큼 경험 있는 전문가가 필요했고, 이팀장은 네트워크를 넓혀보고 싶은 생각으로 은행의 ‘러브콜’에 응한 것이다.하나은행서는 전공을 십분 살려 상품 개발, 연금 퇴직신탁 관리와 영업 등 일인 다역을 해내고 있다. 가장 애쓰고 있는 것은 영업이다. 은행들은 지점에 신탁 영업을 맡기고 본사에서는 직접 하지 않는 게 관행.하지만 그는 매년 연봉 계약을 갱신하므로 확실한 ‘업적’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은 까닭인지 하나은행 연금 퇴직 신탁팀은 2000년 2,250억원(납입 부금 기준)을, 2001년에는 3,599억원을 유치했고, 은행 가운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같은 금융사지만 은행과 보험사 분위기는 무척 다르고들 한다. 일반적으로 보험사 분위기가 ‘화끈하고 거칠다’면 은행은 ‘조심스럽고, 체계적이고, 깔끔하다’고 종사자들은 말한다. 이팀장 역시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보험사에서는 프리랜서에 가까웠거든요. 영업 성과만큼 보수도 가져가고요. 정시 출퇴근 같은 것도 낯설었고, 윗분들이 일일이 관리하는 것도 어색했죠. 지금은 서로 적응을 해서 시너지가 나는 것 같습니다”은행으로 올 때 그가 소망한 대로, 네트워크는 훨씬 넓어졌다. 법인영업임에도 불구하고 ‘잡상인과 보험사 직원 출입 금지’라며 받아주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은행에서 왔다’고 하면 일단 얘기를 들어준다. 단적인 예로, 보험사에서 그가 접촉하던 기업은 200여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1,000여개에 이른다.보험과 은행 양쪽을 모두 겪어본 이력은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된다.“같은 연금 퇴직 상품이라 해도 은행과 보험사는 차이가 많아요. 하지만 고객 입장서 보면 은행이든 보험사 상품이든, 하나를 골라야 하거든요. 그럴 때 양쪽 상품을 두루 이해하고 있으면 조목조목 설명을 해줄 수가 있죠”또 그는 앞으로 방카슈랑스가 본격화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