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전통적인 흐름을 애써 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편 그러면서도 그 흐름 아래로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변형시키는 그네들의 문화적 특성을 볼 수 있다.물론 이 예측불허의 문화 트렌드는 종종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긍정적인 결과도 낳지만, 깊이를 잃어버린 채 그냥 부유하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더구나 우리 역시 그 깊이는 뒷전이고 그들의 문화를 그저 추종하며 따라가는 데 급급하고 있지 않는가.하지만 일본 문화, 특히 일본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가운데는 그냥 그렇게 한순간의 현상으로 내버려두기만은 힘든, 뭔가 의미 있는 모습을 띠고 있는 것들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를테면 바쁜 도시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아낸 잠깐의 여유를 예술 감상의 기회로 삼는 많은 도쿄인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도쿄 곳곳에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만약 이곳들을 찾게 된다면 한적한 평일 오후가 어떨까 싶다. 조금 덜 붐비는 가운데 충분히 예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뜻밖에 많은 일본인들이 한가로운 표정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고 있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그 대표적인 곳이 아닐까 싶다. 2년 반 동안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끝내고 다시 도쿄인들에게 다가온 이곳은, 높다란 석벽과 내부를 좀체 볼 수 없도록 빼곡히 심어놓은 나무들로 황실의 권위를 대신하려는 듯한 황궁을 마주하고 있다.게다가 녹지가 잘 조성된 공원과 나란히 있어 적잖은 이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면서, 무엇보다 전시공간이 넓다. 미술관 곳곳에는 편안한 쉼터를 배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미술관을 찾는 진짜 이유인 미술품 감상 외에도 여유 있는 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지난 1월 문을 다시 연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는 세밀한 터치가 특징인 일본 전통 화법의 전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일본 근대 미술을 중심으로 세계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모던’이라는 테마로 이 작품들이 전시돼 있기 때문에 직선과 모노톤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미술관의 외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일관성을 띠고 있다. 근·현대의 미술 작품들이 가진 흐름을 한꺼번에 일별해 볼 수 있는 터에, 규코도 카와이의 병풍 산수화 을 포함해 토시 마루키의 목탄화, 그리고 초현실주의 경향에 심취했던 현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특히 토시 마루키의 목탄화 연작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과 강한 반전을 드러내고 있어 일본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의 시선을 한참 동안 가둬놓는 작품이기도 하다.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뒤 행방이 묘연하다가 지난해 광주에서 뒤늦은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던 작가 조양규의 작품들이 상당수 전시돼 있다는 점. 분단과 단절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괴리감을 선과 색의 분할로 묘사하던 그의 화풍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또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세계 유명 작가들의 조형작품들이 따로 전시실을 내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도 그만의 기발한 조형미를 드러내며 상설 전시되고 있다.한국인 관람객들에게 무척이나 흥미 있을 법한 전시물들인데, 따지고 보면 일본과 세계, 그리고 이웃한 우리나라의 작품들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면서 다양하고 폭넓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조양규·백남준 등 국내 작가 작품 다양많은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의 스타일을 좇아, 이곳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는 마치 미술관과는 별개의 공간으로 마련된 듯한 느낌의 화려한 프랑스풍 카페 ‘Queen Alice Aqua’를 만날 수 있다.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원소기호 ‘H2O’가 인상적인 이 카페는 투명한 식기류의 깔끔함과 은은한 실내 분위기가 그만인 곳이다. 최근 프랑스풍 퓨전 요리를 즐기는 일본인들의 경향을 반영하듯 일본인의 입맛을 맞춘 프랑스 요리들로 무척 인기 있다.고급 레스토랑으로도 손색없는 맛에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로 특히 근처의 직장인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특별한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환영받고 있다.토요일 점심을 위해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는다면 자칫 레스토랑 밖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다. 미술관과 무관하게 오직 이곳만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미술관 관계자의 설명에 주객이 뒤바뀐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미술관과, 그것이 마련하고 있는 공간들이 도쿄인들의 손길에 무척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미술관은 사람들이 그들의 취향에 따라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기에 사람들 또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가까이 두는 만큼 예술의 참맛을 느끼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무엇보다 ‘국립’ 미술관이면서도 장르의 파격이나 다양함을 모두 소화해 내고, 어느 레스토랑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갤러리 카페를 갖추고 있을 만큼 창의적인 발상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찾는 도쿄인들이 예술품을 보고 즐기는 일에 익숙한 유럽인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어딘지 많이 닮아가고 있음을 느낀 것은 미술관 휴게실에서, 입구 계단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젊은이들과 마주쳤던 순간이었다.◆여행 메모도쿄 정보 : 인천 공항에서 동경 나리타(成田) 공항으로 향하는 노선은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전일본공수, 일본항공, 일본에어시스템 등이 매일 운항하고 있다.나리타 공항에서 도심까지의 거리는 약 60km. 도심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은 철도, 리무진 버스, 택시 등이 있다. 철도는 나리타 공항역(제1터미널 지하)과 제2터미널 빌딩 지하에 있는 공항 제2빌딩역 두 곳에서 도쿄역을 비롯한 도쿄 시내 주요 지역을 운행하는‘JR 익스프레스’와 도쿄역까지 운행하는 ‘JR쾌속 에어포트 나리타’, 우에노역간을 운행하는 ‘케이세이 일반전철’을 포함해 ‘스카이라이너’ 등을 이용할 수 있다. 도쿄 주요 호텔과 도심공항터미널을 경유하는 리무진 버스도 이용할 수 있는데,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미술관 정보 : 주소-東京都千代田區北の丸公園3/문의-03-3214-2561/www. momat.g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