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동토의 땅이었던 인천시 부평구 대우자동차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쳤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의 매각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햇살이 부평 모든 지대에 고루 닿은 것은 아니다. GM은 대우자동차의 본사 사무직, R&D연구소만 인수하고 공장은 인수치 않기로 했기 때문.4월 23일 대우자동차 정문에는 이같은 분위기를 알리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이 동시에 펼쳐졌다. ‘새마음 새출발’ ‘L6 매그너스 직렬 6기통 중형차 탄생’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공장 정문 왼쪽으로 ‘정리해고 해결하라’는 플래카드를 단 정리해고자들의 단출한 농성 천막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명암이 엇갈린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다녀왔다.명 :지난 99년 8월 대우차의 워크아웃이 결정된 후 부평공장 일대는 싸늘해졌다. 2000년말 대우차가 최종부도 처리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부평의 지역경제는 악화 일변도로 나갔다. 특히 지난해 2월 부평 승용 1,2 공장의 가동이 중단된 후 1,730여명의 직원이 정리해고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조립1공장에서 만난 품질관리1부 허영재씨는 “지난해 3~4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다가 그나마 나오기 시작한 월급이 예전 160~170만원에 훨씬 못미치는 80~90만원에 지나지 않아 무기력감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GM과의 본 계약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밀린 봉급이 나오게 됐다며 허씨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이번 대우차 협상에서 GM측은 가동률, 생산성, 파업기간 등이 일정조건을 충족하게 될 경우 부평공장을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회 일각에서는 ‘반쪽의 매각’이라고 표현하지만 부평공장 직원들의 결의는 남다르다.신차인 칼로스 제작으로 분주하던 조립1부 강희원씨는 “GM이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해 부평공장도 인수돼야 생존할 수 있다”며 “사장 주머니가 아닌 고객 주머니에서 월급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GM이 요구하는 기준치에 이르기 위해 자동차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소비자가 제품을 찾게 되면 대우차는 회생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강씨. 그는 “이제는 자신 있게 대우 신차를 주변사람들에게 권한다”고 말했다.GM에 인수되는 사무직·연구직 사원들의 감회는 더욱 새롭다. 홍보실 조윤선 대리는 “GM 직원이 되면 월급을 많이 받겠다고 주위사람들이 부러워한다”며 “그러나 아직 본 계약이 완전히 체결된 것은 아니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수 대상이 아닌 생산직 직원들과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사무직원과 연구원의 입장이다.지난 2000년 사업본부장(공장장)으로 취임한 한익수 상무의 경영철학도 부평공장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등 해외 경영사례를 수차례 목격한 한상무는 ‘품질 좋은 자동차는 사람이 만든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그는 지론을 펼치기 위해 경영혁신운동인 ‘환경품질책임제’를 실시했다. 한상무는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직원 양성이 제품품질을 높이는 밑거름이 된다”며 “물리적인 작업 환경과 일하는 분위기부터 바꿨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깨끗한 공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는 그는 부평공장 27만평 대지를 7,000여명 전직원에게 5~10평씩 할당했다.직원 개인별 담당구역을 정해 맡은 지역을 최대한 쾌적하게 유지토록 한 것이다. 조립1공장에서 ‘가동률 98.6%’라 표기된 전광판을 가리키며 한상무는 “3년 안에 GM이 부평공장을 인수하도록 만들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암 : 부평공장 정문을 빠져나오자 ‘정리해고 분쇄 특별투쟁 위원회’라는 문구가 부착돼 있는 천막이 보였다. 여기엔 해직자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부평공장 주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해직자는 약 200여명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문진수 노동조합원은 “지난해 1,730여명을 해직할 때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마이너스 통장도 한계에 달했는데 아이들 학비뿐만 아니라 당장의 식비조차 걱정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은 불신감에 싸여 있다. 문씨는 “대우도, 정부도, 미국 GM도 다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심지어는 지난해 2월 해고자들의 재취업을 도모하는 문을 연 ‘희망센터’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해직자 중 300명이 재취업하기로 대우차와 협상했으나 더 많은 인원이 복직될 때까지 계속 투쟁하겠다고 이들은 말했다.부평공장 서문 밖으로 ‘새월천 6길’이 뻗어 있다. 이곳에 있는 식당, 카센터, 술집, PC방, 당구장 등의 주요 고객은 대우차 직원들이다. 8년 전에 문을 연 식당 ‘대우정 숯불갈비’의 안병원 사장은 “대우사태 후 매출의 50% 이상이 줄었다”며 “그 전엔 하루에 150만원을 벌었는데 이젠 40~60만원을 번다”고 말했다.고기를 주로 먹던 대우차 직원들이 요즘은 찌개를 주문한다는 것이 안씨의 설명. GM과 협상이 마무리된 후 대우차 사원들에게서 그는 “햇빛은 아직 비치지 않지만 희망이 서린 동이 틀 무렵의 분위기를 느꼈다”고 표현했다.중국집 ‘대우성’ 문춘곤 사장은 “지난해에는 적자가 나기까지 했다”면서 “GM과 협상타결 후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의 카센터 ‘대흥 카 자동차 공업사’도 사정은 마찬가지. 직원 박준형씨는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는 대우직원들이 감소해 손님 80%가 줄었다”고 말했다.공장 정문 부근의 SK엔크린 공단주유소의 고객 30%도 대우차 직원이었다. 그러나 대우 일련의 사태를 겪고 난 후 고객이 감소해 매출 50%가 줄었다고 한다. 대우차 직원들의 회식 빈도수가 줄어들면서 부평공장 주변의 음식점과 술집은 작년 이후 크게 감소했다고 상인들은 말한다. 1년 전 개업한 커피숍 ‘하이트’ 자리에는 단란주점이 있었다는 것이 이곳의 사장 이봉우씨의 설명이다.이처럼 대우차 부평공장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부평의 매출액 중 18.4%, 수출의 20%, 고용의 11.2%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56만 부평주민은 워크아웃 이후 대우차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대우차 살리기 범구민협의회’, ‘대우차 직원자녀돕기 바자회’ 등을 통해 대우차가 정상화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박수묵 부평 구청장를 비롯한 부평구청 직원들의 명함 뒷면에는 대우의 자동차 사진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대우차 홍보맨이라고 자칭하는 박구청장은 “대우차 사기 운동을 수시로 벌이고 있다”며 “한때 부평의 자동차 중 54% 이상이 대우차였는데 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