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식품 유통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최근의 변화 중 하나는 소비자들의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것이다. 광우병 파동이 작년 가을 식탁을 덮친데 이어 올해는 허위 표시를 하다 적발된 사례들이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일본 후생성은 유키지루시식품의 허위표시 발각 사건이후 식육판매업자들에 대한 일제 조사에서 식품위생법을 위반한 표시사례가 무려 1992건에 달했다고 4월 23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신용과 정직이 장사의 기본 룰이라며 소비자를 속이는 일만큼은 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일본 유통업체와 상인들의 이미지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다.구겨진 체면을 회복하고 신뢰를 되찾기 위한 유통업체들의 노력은 다각도로 전개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쌀 관리 과정에 DNA(디옥시리보핵산)감정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DNA감정은 이름을 다른 것으로 가장한 품종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값도 싸고 맛도 떨어지는 쌀이 고가, 고급품종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납품될 경우 이를 판매하는 유통업체들은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어서다.DNA 기법을 동원하는 업체들은 산지와 중간 도매상 등에서 구입한 쌀이 실제 납품되기 전 전문업체에 감정을 의뢰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민간검사업체인 해외화물검사(OMIC)는 지난 2, 3월 두달 동안의 의뢰건수가 월간 약 50건으로 평소의 2배로 늘어났다.4월 들어서는 하루 10~30건씩 산더미처럼 밀려 들어와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4월부터 검사 서비스를 시작한 도쿄의 일본곡물검정협회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반기업들의 의뢰는 사절하고 있는데도 벌써 40여건의 주문이 들어와 있다.협회는 당초 예상보다 검사요청이 폭주하자 장비와 인원을 확충, 연간 2,000건을 처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로 했다.DNA감정은 쌀의 분말에서 먼저 DNA를 추출, 이를 보존중인 데이터와 대조, 조회시키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고시히카리’ ‘아키다 코마치’등 일본에서 고급으로 인정받는 품종들과 의뢰받은 쌀이 과연 같은 물성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별해 내는 식이다.또 의뢰받은 쌀 자체의 품종을 판정하는 서비스도 해 주고 있다.그러나 산지에 따른 결과 판정은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같은 쌀이라 해도 니가타, 아키다, 도쿠시마등 산지가 어디라는 결과는 가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사업체들은 품종 판정에 1회 2만엔을 받고 있다. 품종을 특별히 지정해 실시하는 검사 비용은 8만엔이 기준이다.“쌀도 다같은 쌀 아니다” 척척 감별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유통업체와 일선 쌀 판매상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담담해 하고 있다. 요즘 같이 불신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한번이라도 허위표시된 쌀을 팔았다가는 그길로 끝장이라는 절박감 때문이다.쌀 검사의뢰에는 도쿄 일대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방 업체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으며, 대형 쌀 도매업체 기도쿠와 야마다다네는 감정 대상 쌀을 계속 늘려 가고 있다.슈퍼 업계에서는 일본 최대의 슈퍼체인업체인 이토요카도가 작년 가을부터 쌀 감정의뢰를 시작한데 이어 나머지 대형업체들도 잇달아 감정기법을 동원하고 있다.식품 위생관리와 품질에서 일본은 세계 정상급 국가라는 명성을 누려왔다. 육종학이 발달된 선진국답게 쌀과 채소, 과일은 일본산 종자가 세계 최고수준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광우병파동과 일부업체들의 사기행위는 소비자들에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그리고 이는 불신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쌀과 같은 농작물 판매에도 DNA검사라는 첨단과학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국민들의 정직성을 뽐내온 일본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