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는 가전쇼핑몰.통신판매 전문업체 중 일본 정상을 달리는 ‘센슈카이’는 지난 5월 발간한 여름호 고객용 카탈로그에 실린 상품 중 절반 이상의 평균가격을 상향조정했다. 장사가 죽을 쑨 최근 3년 동안 해마다 판매가를 끌어내린 까닭에 카탈로그 표시가격이 20% 정도 낮아졌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지나친 가격인하로 채산성이 너무 나빠져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위기의식도 값을 올린 배경의 하나였다.일본 외식업계의 차세대 기수업체로 꼽히는 패밀리 이자카야(구미식 펍에 해당하는 음식점) 운영업체 ‘와타미’는 최근 수년간 연례행사로 실시해 왔던 봄철 가격인하 판매를 올해는 중지했다.세이부백화점은 6월5일부터 일본 전역의 모든 점포와 매장에서 와인색 계통의 가을의류를 팔기 시작했다. 지난해보다 한 달이나 빠른 입점이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열리기도 전에 가을의류를 들여놓은 것은 세이부만이 아니다. 이세탄백화점도 이에 뒤질세라 가을의류 입점을 결정했다. 계절적으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미리 고르려는 고소득층 고객들에게 얼마든지 제값에 팔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굿바이, 디스카운트!’일본언론은 소비 현장에 나타난 이 같은 변화와 관련, 내리막길 일변도를 달려 왔던 유통·서비스업체들의 가격전략이 종지부를 찍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10년 이상의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 압력에 허덕이면서 염가판매로 연명해 왔던 각 업체들이 경기회복을 등에 업고 너도나도 제값 받기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일본언론의 진단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증시와 부동산시장이 완전한 활력을 못 찾고 있고, 경제도 성장궤도에 진입을 자신하지 못하지만 소비 현장을 바라보는 기업과 상인들의 표정은 지난해 말보다 한결 밝아져 있다.일본의 간판 유통업체 ‘이토요카도’는 올 가을부터 한 벌당 2만9,000엔과 3만9,000엔짜리 중고가 신사복을 내놓기로 최근 확정했다. 신사복 이외에 다른 의류도 고품질 제품의 취급을 확대키로 결정, 일본 국내에서 만들어진 ‘메이드 인 재팬’을 중심으로 한 고가품 판매에 적극 힘을 쏟기 시작했다.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는 가전쇼핑몰.의류·유통 전문가들은 이토요카도의 전략변화가 상당한 의미를 시사한다고 보고 있다.일본시장에서 팔리는 염가의류는 십중팔구 중국산이거나 동남아, 북한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업체들이 원가압축을 위해 저임금 국가에서 싼 노동력으로 만든 후 이를 들여와 매장에 걸어놓은 상품이 태반이다. 여기저기에서 값싼 옷이 속출하고 조금만 더 비싸다 싶으면 아예 싸움도 붙어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메이드 인 재팬’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한술 더 떠 이토요카도는 올 초까지만 해도 한 벌에 9,800엔짜리 신사복을 내놓으며 경쟁업체들을 경악시켰다.이 같은 점을 종합해 볼 때 이토요카도의 전략선회는 하반기 시장전망에 대해 회사측이 든든한 자신감을 갖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염가상품 전성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는 자동차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도요타자동차가 5월8일 발매한 소형승용차 ‘이스트’는 ‘소형=싼값’의 등식을 보기 좋게 깨버린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배기량 1,500㏄의 이 승용차는 옵션까지 포함하면 가격이 대당 200만엔을 훌쩍 넘어버린다. 어지간한 중형차 가격에 버금가는 수준이다.그런데도 이 차는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닛산의 ‘마치’, 혼다의 ‘피트’ 등 강력한 경쟁차종이 버티고 있는 데도 주문 후 2개월은 기다려야 인도받을 수 있다는 게 도요타측의 자랑이다.전자·통신기기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도시바, 소니 등 컴퓨터 메이커들은 5월 초의 황금연휴가 끝난 직후부터 컴퓨터 출하가격을 10% 가량 일제히 인상했다. 시장 일선의 판매가도 올랐음은 물론이다.고객들이 동전 몇 닢 단위의 가격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의점 업계에서도 디스카운트 싸움은 막을 내리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고급 식자재를 썼다며 최근 개당 150엔을 넘는 주먹밥을 매장에 진열해 놓고 있다. 주먹밥 가격이 100엔을 위협할 만큼 무섭게 내려갔던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하면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이다.기업들의 가격전략 수정과 관련, 전문가들은 두 가지 각도에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첫째, 국내총생산(GDP)의 플러스성장 등 경기회복을 알리는 청신호가 뚜렷해지면서 기업들이 향후 소비활동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개인소비활동이 아직 침체국면에 있지만 수출이 강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경기도 좋아지고 있어 소비 현장에 봄이 올 가능성은 높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전문가들은 또 가격인하에만 매달렸던 기업들의 원가절감 싸움이 여기저기에서 한계에 부닥친 데다 싸구려 상품에 싫증을 느낀 소비자들이 늘어난 것도 전략선회의 배경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제값 받기 전략이 시장에서 기업들의 의도대로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대량실업을 골자로 한 고용문제가 경제안정의 지뢰로 남아 있는 데다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은 지난 한해 동안 전년 대비 0.6% 감소했다는 것이 후생노동성의 발표이기 때문이다.경제평론가 다나카 미쓰루씨는 “디플레이션 심리가 여전한 상태에서 소비자들은 아직 소폭의 가격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하면서 “향후 가격체계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시장에 파고들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