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누가 교섭 당사자입니까? 바로 납니다. 실제 권한을 갖고 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까.”하이테크 첨단 기업과 유망 중소기업들에 환상의 그라운드로 대접받아 온 미국의 나스닥이 일본 진출 2년 만에 철수를 결심했다는 첫 보도가 나간 지난 8월14일 아침. 오사카증권거래소의 다쓰미 고로 사장은 후속 취재를 위해 몰려드는 기자들에게 정색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미국 나스닥과의 최종 교섭권을 가진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내용이 어떻게 신문에 났느냐고 잡아뗀 뒤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16일 오후, 그는 나스닥과의 업무제휴 계약을 오는 10월15일자로 해지키로 했다며 나스닥은 미국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기자들 앞에서 읽어 내려갔다. “누가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했느냐”며 취재진을 몰아세웠던 14일 아침의 발끈한 표정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고 그는 평상시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21세기 흑선(黑船)의 좌절.’다쓰미 사장의 발표를 지켜본 일본의 한 증권전문가는 나스닥의 철수를 이 같은 표현으로 잘라 말했다. 일본을 쇄국의 사슬에서 풀어낸 페리 제독이 1853년 타고 온 배가 19세기 흑선이었다면 나스닥은 일본 자본시장의 빗장을 열어젖힌 또 하나의 흑선이었는데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깃발을 내리고 말았다는 것이다.미국 나스닥의 자회사인 나스닥재팬(주)의 시장운영을 맡고 있는 오사카증권거래소는 잠정 조치로 연말까지는 ‘나스닥’ 브랜드를 계속 쓰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거래활동을 정상적으로 지속하는 한편 앞으로는 시장이름을 ‘뉴재팬마켓’으로 바꾸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나스닥재팬(주)은 업무를 중단하고 법인청산을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 착수했다.미국 나스닥의 일본시장 철수배경과 향후 변화 등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나스닥과 나스닥의 자회사인 나스닥재팬(주), 그리고 오사카증권거래소의 3자 관계를 우선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나스닥재팬(주)은 미국 나스닥이 재일동포 실업인 손정의씨의 소프트뱅크와 50대50의 비율로 모두 6억엔을 출자, 99년 6월 설립한 합작 자회사다. 이후 꾸준히 증자를 추진해 오면서 다이와증권 등 일본의 15개 증권사가 소액주주로 참가, 자본금이 32억5,000만엔까지(2000년 10월 기준) 늘어났다.이 과정에서 손씨와 나스닥의 지분은 각각 42.5%로 낮아졌다. 시장개설은 법인설립 1년 뒤인 2000년 6월에 이뤄졌으며 시장운영과 대금결제 등 거래관련 지원업무를 오사카증권거래소가 맡아왔다.말하자면 나스닥의 자회사인 나스닥재팬(주)은 상장대상 기업을 발굴하고 마케팅, 기획업무에 매달린 반면, 오사카증권거래소는 전산시스템과 인력을 활용해 ‘나스닥재팬’이라는 시장의 운영을 전담하는 분업체제를 구축해 온 것이다.나스닥재팬 첫출발부터 삐걱거려계약에 따르면 나스닥재팬(주)은 상장수수료 등 기업들이 오사카증권거래소에 지불하는 돈을 전액 가져가는 한편 배당 명목으로 3년간 총 21억엔의 고정배분금을 지급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시장개설 직후부터 불어 닥친 정보기술(IT) 불황의 여파로 유망 중소기업과 인터넷 벤처들의 상장이 기대치를 밑돌면서 나스닥재팬(주)은 첫출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까지 모두 53억엔의 누적적자를 짊어지게 됐으며 급기야 2003년 1월부터 고정배분금을 깎아 달라고 오사카증권거래소에 정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하지만 증시침체로 인한 투자자 이탈과 수입 감소로 고민 중인 오사카증권거래소와의 협의는 순탄치 못했으며 결국 양측은 갈라설 결심을 하게 됐다. 미국 나스닥은 오사카증권거래소의 철수발표 전인 지난 8월9일 나스닥재팬(주)에 투ㆍ융자한 24억엔을 모두 손실처리 하기로 했다고 밝혀 이미 결별수순을 밟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벤처, 유망 중소기업을 집중 발굴해 상장시켜 온 나스닥재팬에는 현재 스타벅스 커피 재팬 등 모두 98개사가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934개사를 상장시켜 놓고 있는 자스닥(구 점두시장)에는 크게 떨어지지만 8개월 먼저 시장 문을 연 도쿄증시의 마더스(36개사)보다 훨씬 빠른 스피드로 진열대를 채웠던 셈이다.나스닥의 철수에 따라 나스닥재팬 상장기업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한 신문의 긴급 설문조사에서 98개사 중 54개사(64.3%)는 오사카거래소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고 밝힌 반면, 21개사(25%)는 자스닥이나 마더스로 이적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9개사(10.7%)는 ‘아직 어떻게 할지 망설이고 있다’고 답해 이번 결정으로 40%에 가까운 기업들이 동요하거나 충격을 받았음을 보여 주었다. (표1)철수결정에도 불구, 일본 전문가들은 나스닥이 일본 자본시장의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 기술력과 아이디어는 뛰어나도 자금조달 루트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벤처, 중소기업들에 대량 상장시대를 열어 주었고, 시장간의 경쟁을 촉진시켜 투자자들의 선택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미국, 유럽, 일본을 잇는 24시간 거래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구상과 3년간 500개사 상장이라는 목표가 ‘꿈’으로 끝났지만 투자자와 시장 저변 확대에 기폭제 역할을 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손정의 사장, 투자자 아닌 실업가 선언나스닥의 철수는 나스닥재팬(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소프트뱅크와 손정의 소프트뱅크사 사장의 위상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미국 나스닥과의 파트너십은 끝나지만 나스닥재팬의 스피릿(정신)은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나스닥재팬의 임원으로도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손사장은 8월16일 오후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후 입을 닫았다.손사장은 미국 나스닥으로부터 철수통보를 받은 지난 7월 초 이후 나스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나고야, 후쿠오카 증권거래소를 찾아가 시장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철수를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후문이다. 나스닥재팬(주)의 청산으로 소프트뱅크의 직접적 손실은 투자액 12억엔 정도에 불과하다고 소프트뱅크측은 밝히고 있다. 투자규모가 크지 않아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큰 타격은 받지 않았다는 설명이다.그러나 증시 관계자들은 소프트뱅크그룹의 전체 위상과 이미지가 어떠한 형태로든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의 주력 계열사 가운데 7개사가 나스닥재팬에 상장된 상황에서 나스닥의 철수는 그룹 전체의 주식공개 및 자금조달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소프트뱅크의 주가는 발표 전 이미 연초 이후 최저가를 경신, 나스닥 철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투자자가 아니라 실업가로 대접받고 싶다.”야후 재팬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에 그룹 전체의 명운을 걸고 있는 손사장은 공격적이고 무분별한 투자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승부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만 나스닥의 철수는 그의 꿈에 또 한 차례의 실패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