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떼의 직장인 아저씨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그런데 이 아저씨들, 좀 이상하다. 밥을 다 먹고 났는데 영 사무실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눈치다. 대신 남대문시장통을 하릴없이 기웃거리고 다닌다.상점들 즐비한 명동거리까지 진출하더니 사지도 않으면서 이 가게 저 가게 들락날락.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서 뭘 찍기도 한다. ‘겉은 멀쩡해 뵈는데 백수들인가?’ 상점주인들은 단체관광객이라 생각했는지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다.이들은 우리은행 개인상품개발팀원들. 이창식 부장에 의해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생생한 현장에서 신상품 아이디어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저녁 때 퇴근하면 패밀리레스토랑에 가보기도 하고, 뮤지컬 등 공연도 본다.얼마 전에는 요즘 강남에 많이 생긴다는 하우스 맥주집에 가봤고, 부산아시안게임 태스크포스팀에 끼어서 북한응원단을 보고 오기도 했다. 이렇게 회사돈 받아 ‘놀러 다니는’ 것 역시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다.월드컵 열기 ‘레포츠 예적금’ 대박 한몫이렇게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나온 대표적인 히트작이 ‘우리사랑 레포츠 예적금’이다. 이는 예ㆍ적금 가입자가 운동시설, 콘도 등 레포츠 관련 용품을 이용하거나 살 때 할인혜택을 주고, 예약서비스를 제공하며 무료보험에 가입시켜 주는 상품이다. 판매 100일 만에 5조원을 돌파하는 등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이 상품의 최초 아이디어는 의외로 외국에서 물 건너 왔다. 이 은행 개인상품개발팀 김종두 과장은 지난 4월에 해외상품을 벤치마킹하려고 해외연수를 갔을 때 스위스에 사는 한 동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이 “요트 하나 마련해 볼까 하고 20년 동안 장기적금에 들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집을 사려 한다거나 자녀교육이 목적이 아닌, 여가를 즐기기 위해 꼬박꼬박 돈을 붓고 있다는 게 신선하게 들렸다. 일주일에 5일만 일하는 게 일찌감치 자리잡은 유럽 사람들의 생할패턴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그러지 않아도 그즈음 팀 내에서는 ‘주5일 근무제’ ‘월드컵’ 분위기에 딱 맞는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화두로 고민하던 참이었다. 아이디어 채택 한 달 만에 개발을 마치고 바로 판매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했던 월드컵 열기 등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얻었다.우리은행이 개인상품개발팀을 만든 것은 지난해 8월. 직접적으로 상품개발에 매달리는 인력은 10여명이다. 이들의 생활은 3개월 주기로 돌아간다. 하나의 상품이 새로 태어나서 온전히 자리잡을 때까지 이 정도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첫 번째 단계는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내놓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시장나들이와 같은 현장학습, 해외사례 등에서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영업점 모니터 요원들의 의견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루 대여섯 번은 기본인 아이디어 회의에서 기획이 채택되면 구체적인 상품설계에 들어가게 된다.다른 회사와의 제휴를 통한 부가서비스 등이 포함된 상품이라면 제휴업체를 섭외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상품 윤곽이 완성되면 전산부서와 리스크관리부서 등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 여기까지 끝나면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모니터요원들을 통해 반응을 검증한다.감독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등의 절차를 마치면 드디어 고객을 만날 차례.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실제로 판매를 하면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견되거나 고객의 의견을 접수해 2~3개월 동안 이런 점들을 수정 보완해줘야 한다. 그다음은 또 새상품 기획에 매달린다.10여명의 개발자들은 수신상품 개발 전문, 여신 전문, 마케팅 전문 등 제각각 전공분야를 갖고 있다.요즘 이들은 금융업과 전혀 관계없는 화장품 등 소비재 마케팅, 상품개발자들과도 교류를 갖는다. 마케팅 수준이 이런 소비재 회사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뒤떨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식 부장은 “금융상품 마케팅은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다. 팀원들 하나하나에게 자기 분야를 개척해 전문가가 되라고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다음에는 어떤 상품이 나올까? “홈쇼핑회사와 함께할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 중입니다.” 자세한 답을 회피하며 덧붙인 말이다.한국투자신탁증권 금융상품연구소특허상품 줄줄이 ‘연구소’이름값한국투자신탁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처음으로 상품개발부서를 격상시켜 아예 연구소로 만들었다. 문을 연 지 1년, 그동안 20여가지의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보냈다.처음에 이 연구소를 만들 때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권오경 소장은 “시장 상황이 변했다. 이제 금융회사의 경쟁력은 상품이 좌우할 수밖에 없다”며 “우리 연구소가 상품개발에서 업계를 이끄는 선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한투증권 금융상품연구소의 대표상품은 지난 4월 ‘배타적 독점판매권’을 받았던 ‘부자아빠 펀드’다. 10월9일까지 8,170억원이 설정됐다.수수료 먼저 받는 ‘그랜드 슬램’탄생투신상품이긴 하지만 은행상품, 보험상품의 요소를 응용해 가미했다. 대학, 유학, 결혼 등 자녀의 성장단계마다 인출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조금씩 돈을 나눠 넣을 수도 있고, 한꺼번에 목돈을 넣는 것도 가능하다. 30대 젊은 부모들은 적립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50대 이상은 주로 한 번에 큰돈을 넣었다.펀드 이름 ‘부자아빠’는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참신하지는 않았지만 고객들에게 매우 친숙했고, 펀드의 성격을 잘 요약해 나타내주는 이름이었다.부자아빠 펀드의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는 홍성일 사장. “보험성격을 가미한 상품이 어떻겠느냐”고 실마리를 던졌고, 이에 상품연구소에서 개발에 착수했다.또 연구소는 지난 1월 수익증권 중에서 처음으로 수수료 선취형(해지시 운용보수를 받는 게 아니라 미리 수수료를 떼는 것) 펀드인 ‘그랜드 슬램’을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수수료를 미리 받는 것은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연구소 내부에서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구체화됐다. 펀드를 해지할 때 내는 수수료는 고객들이 나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수익증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다. ‘원할 때 곧장 나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은 ‘주식을 거래할 때는 수수료 먼저 받지 않느냐’는 착안으로 이어졌다.권오경 소장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들 반신반의했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수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 미리 받는다고 하면 외면당할 것’이라는 의견이 적잖았기 때문이다.결국 수수료를 미리 떼면 장기·중기·단기 펀드라는 기간 개념을 무너뜨릴 수 있어 투자자들이 주식시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음이 증명됐다. 지금은 모든 투신사에서 이 같은 수수료 선취형 펀드를 판다.한투증권 금융상품 연구소는 ‘연구소’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금융상품의 특허라 할 수 있는 배타적 우선판매권을 받은 상품이 5개나 된다. ‘부자아빠 펀드’와 ‘델타플러스 안정혼합펀드’ 등 투신상품 2개와 ‘분리형 신주인수권부 변동금리부채권’ ‘제로쿠폰 이표채’ ‘이자평형채권’등 증권상품 3개가 그것이다.델타플러스 안정 혼합펀드는 옵션을 사용하지 않고도 주가지수가 하락하거나 상승하거나 양방향 수익을 모두 창출할 수 있게 설계한 상품이다. 일종의 시스템 펀드이기 때문에 펀드매니저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적고, 고객의 투자성향에 따라 맞춤서비스도 가능하다.조흥은행 상품운영부‘찾아가는 마케팅’으로 고객 사로잡아조흥은행은 상품 관련 부서를 한데 모아 아예 부로 키워놓았다. ‘OK상업용 부동산대출’ ‘드리블 정기예금’ 등의 대표상품이 여기에서 나왔다.그중에서도 히트작은 ‘MSS신용대출’이다. 보통 대출상품은 고객이 찾아와서 대출이 가능한지, 한도와 금리기간은 얼마인지를 물어보게 된다. 하지만 MSS신용대출은 이 순서를 역전시켜 은행이 먼저 ‘당신은 얼마의 금액을 당장 대출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준다. ‘찾아가는 마케팅’을 한 것이다.‘당나귀 대출 만들어 주세요’최초 발상은 전덕렬 부부장에게서 나왔다. 그는 미국 은행들의 ‘사전 한도 승인제’에 착안했다. 먼저 조흥은행의 기존거래 고객 900만명의 데이터를 분석, 신용대출이 가능한 이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약 10번의 모의실험을 거치면서 대상이 된 우수고객 130만명에게 최고 3,000만원까지 신용대출을 해 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처음 기획안을 올렸을 때는 “위험하지 않으냐”는 우려도 적잖았다.고객에게 편지(DM)를 발송하는 것은 미국 은행들이 하는 방법이었다. 전부부장은 이에 더해 현금인출기를 이용할 때 창에 ‘지금 즉시 얼마를 담보 없이 대출받으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나도록 하는 꾀도 냈다. 신상품 홍보비가 책정되지 않아 나온 궁여지책이었다.상품운영부 진귀봉 부장은 “사람이 아닌 시스템에 의한, 그래서 원가가 싸고 빠른 상품이 필요한 때라는 판단이 있었다”고 말했다. 만약 900만명이 대출신청을 했고, 영업점에서 이들의 대출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면 6,000명이 이 작업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상품이 판매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연체율이 얼마나 될까 하는 걱정에 잠못이룬 날도 많았다.새 상품 아이디어는 주로 개발팀에서 나오지만 영업점이나 행 내에서 공모되는 아이디어도 적지 않다.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당나귀 대출’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올라온 적도 있다.이 아이디어는 조흥은행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100년 역사를 가진 이 은행사에는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객에게 당나귀를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획기적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착상도 많다.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주택관련 장기(모기지)상품. “부동산시장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해야 가능할텐데 우리나라 주택시장에서는 아직 멀어 보여요.” 전부부장은 말했다.돋보기 ‘배타적 독점 판매권’역할 의문‘베끼고 또 베끼고’… 원조도 헷갈려?‘레포츠 예적금’(우리), ‘캥거루가족 레저통장’(국민), ‘예스레저피아예금’(외환), ‘레토피아적금’(조흥). 이름은 다르지만 유사상품이다. 금융권에는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상품이 한둘이 아니다.심할 경우에는 며칠 차이로 여기저기서 유사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아 어느 게 원조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제각기 ‘금융권 최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껏 신선한 상품을 개발해 봐야 소용이 없다.우리은행 개인상품개발팀의 사무실은 사방을 높은 파티션으로 꽁꽁 둘러막아 놓아서 고립된 성처럼 보인다. 행여 신상품 기획이 새어 나갈까봐 취한 조치다. 같은 이유로 신상품이 준비되면 금융감독원에 인가신청은 최대한 늦추고, 영업점에도 발매 전날에야 일러 준다. “이렇게 갑자기 알려주고서 어떻게 상품을 판매하라는 거냐”라는 지청구를 듣기 일쑤지만 보안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업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고, 아이디어라고 해도 비슷하거든요. 누가 처음 컨셉을 빨리 잡고, 제휴업체를 섭외하느냐가 문제예요.” 우리은행 김종득 과장의 말이다.미 투(Me too)상품의 난립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 지난해 1~6개월간 금융상품의 ‘배타적 독점 판매권’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생겼다. 하지만 10월4일 현재 금감원에 9월까지 인가를 받은 상품은 은행 3건, 보험 2건에 불과했다.반면 증권은 7건, 투신은 4건의 신상품이 인가돼 신상품 개발이 다소 활발한 편이었다. 이에 대해 은행권에서는 “독점판매권이 지나치게 창의적이고 복잡한 것만 판단 기준으로 삼아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시장에서 히트한 상품과 독점판매권을 획득한 상품간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더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사들이 베끼기나 하면서 개발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