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를 왕으로 대접하는 기업문화' 로 인재육성...스카우트 표적되기 일쑤

“혹시 이 회사에 그분 일하나요? 이름이 뭐더라, 푸르덴셜생명 출신인데….” 어느 생명보험회사에 가서 이렇게 묻는 것은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와 똑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현재 국내 생명보험사에서 종신보험 영업에 관계된 인력 중 200여명이 푸르덴셜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영업일선에서 뛰고 있다.이밖에도 임원급으로는 삼성생명의 김승억 상무, 흥국생명 오충섭 상무, 메트라이프생명 최우형 상무, 메트라이프생명 차태진 지점장 등이 대표적인 푸르덴셜 출신이다.최근의 이직 사례 중에서는 푸르덴셜의 라이프플래너(LP)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이채석씨의 이동이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갖가지 신기록을 세우며 보험영업의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이다. 글자 그대로 ‘톱 오브 더 톱’이었던 그는 삼성생명 하나브랜치 지점장으로 옮겨 11월부터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다.이처럼 푸르덴셜생명 출신들이 보험업계에 폭넓게 퍼져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회사가 국내 보험시장에 들여온 새로운 상품, 종신보험 때문이다. 이제 국내 종신보험은 가입 6,000만건을 넘어설 만큼 널리 확산됐지만 91년 이 회사가 영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했다.어떤 이유에서든 가입자가 사망하면 무조건 보험금이 나오고, 특정질병이나 사고에 대한 위험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 상품은 내용도 새로웠고, 판매방식은 그보다 더 독특했다. 당시 우리나라 보험시장에서는 소위 ‘아줌마 부대’가 영업의 주력이었다.그런데 이 회사는 대대적인 광고를 내 4년제 대졸 이상 학력에 보험사 경력이 없는 사람들을 ‘라이프플래너’(LP)라는 이름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영업을 시작하면서는 ‘박사출신의 보험설계사’ ‘억대 연봉의 보험설계사’ 등을 배출해 화제를 낳았다.지점장이 있고, 지점장 밑에 세일즈매니저(SM)라고 해서 새로운 LP를 충원하는 인력을 두는 것 등이 푸르덴셜식 조직의 근간. LP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체계, 새 인력을 충원하고 교육하는 방식 등 모든 것이 획기적이었다. LP들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한 사람의 평생 재정설계를 해주며 보험영업을 했다.이제 재정설계를 해주면서 종신보험을 판매하는 남성조직은 일반화단계에 들어서게 됐다. 삼성생명을 비롯해 교보, 흥국, 동양, 신한, SK 등 거의 모든 국내 생명보험사들이 이를 벤치마킹했다.이 독특한 운영체계를 만들려면 푸르덴셜의 시스템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꼭 필요했고, 여기서 푸르덴셜 출신들이 대거 업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옮겨간 푸르덴셜 출신들은 푸르덴셜과 유사한 시스템을 가진 비슷비슷한 조직을 만들어냈고, 이제 국내 보험사들의 전문 남성 판매조직 운영방식이나 시스템은 모두 거의 유사하다.푸르덴셜측은 이처럼 자사 시스템이 인정받게 된 이유 중 핵심이 “LP를 왕으로 대접하는 기업문화”라고 말한다. 말로만 영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LP를 최고로 인정해 주고, 모든 회사가 LP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이 회사 김동훈 팀장은 “나머지 부서는 전부 LP가 영업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정도”라면서 “회사에서 아무리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아도 모두 깍듯이 ‘LP님’이라고 부른다. 국내 기업에서는 제일 똑똑한 인재는 기획실로 보내지만 푸르덴셜에서는 영업을 한다”고 덧붙였다.김팀장은 일화 한 가지도 소개했다. 푸르덴셜에서는 매달 새로 교육을 마친 LP와 그 가족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행사가 열린다. 가족에게 남편이 어떤 회사에서 일하는가, 무엇을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자리다. 회장부터 임원까지 모두 참석하는 게 원칙일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다.“홍보담당 상무가 유력 언론사의 고위층과 저녁식사 약속을 했는데 이 행사와 겹쳤다. 본인의 업무에 충실한 것으로 따지면 언론사 관계자와의 저녁약속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LP가 중심’이라는 푸르덴셜의 기업문화에 따라 고려할 여지도 없이 행사를 택했다.”그러나 이면도 있다. 푸르덴셜에서 일하다 이직한 한 영업인은 “푸르덴셜은 매년 실적이 못미치는 LP를 해촉하는데 그 인원이 전체의 15%이다”라며 “외국회사라서 그런지 냉정하고 가차없다”고 말했다. 또 푸르덴셜 입장에서도 인력양성소라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오히려 그칠 줄 모르는 인력 빼가기에 위기감마저 느끼는 상태다. 올해 초 푸르덴셜생명과 메트라이프생명은 영업인력 스카우트 문제를 놓고 적잖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영업실적이 ‘톱 클래스’에 드는 핵심설계사들을 집중적인 스카우트 표적으로 삼고 있어 그저 두고 볼 수만 없었던 것이다.또한 국내 금융사로 이직한 많은 외국 금융사 출신들이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푸르덴셜에서 다른 보험사로 옮긴 사람들은 전 직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한다. 삼성생명 이채석 지점장은 “보험업계에는 이동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은행이나 증권사처럼 유연성도 적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은행 사관학교 / 씨티은행금융권 구조조정때 ‘대약진’보험업에서 푸르덴셜 출신들이 약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행권에서도 외국계를 거친 인력들이 득세다. 말할 것도 없이 씨티은행이 단연 ‘인재배출사관학교’로 꼽힌다. 특히 금융사들의 구조조정이 일단락되고 난 후 씨티은행을 비롯한 외국계 금융사 출신들이 대거 국내 금융사의 경영진으로 영입되면서 이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씨티은행 소비자금융한국대표 등을 지낸 하영구 한미은행장을 비롯해 서울은행 강정원 행장, 교보생명 장형덕 사장, 굿모닝신한증권 도기권 사장, 우리금융지주사 민유성 부회장, 금융감독원 이성남 부원장보, 한미은행 원효성 부행장, 제일투자증권 황성호 대표, 신한은행 오용국 상무 등이 모두 씨티은행 출신의 금융계 인사들이다.이들은 한결같이 “씨티은행 출신들이 개인적으로 똑똑하다기보다 시스템이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대단한 노하우가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따져보면 그런 건 없다는 얘기다. “회사수익 외에는 잡다하고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않도록 하고, 이에 맞는 인물을 키우는 것뿐”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인데 결정적인 차이는 이 원칙이 정말 글자 그대로 지켜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씨티은행 출신들이 경영진급으로 파격, 발탁되는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이에 대한 평가와 시각은 매우 엇갈린다. 가장 많은 것이 ‘외국은행 출신이라 해서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몸값만 높다’ ‘역차별이다’ 등이다.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이 하나는 씨티은행에, 하나는 국내 은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현재 외국은행 출신은 선진금융의 전도사로 대접받고 국내 은행 출신은 부실의 주범이 돼 있다.”반면 다른 시중은행의 부장은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외국 금융사는 나이가 젊어도 승진이 빠른 반면, 그만큼 물러나야 할 시기도 빠르다. 외국은행에 간 동창들은 이미 대부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