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이후 클레임 한 건도 없어 … 직원 1인당 매출액 40억원대, 생산성도 ‘으뜸’
‘국내 진출 최고의 외국 기업’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 누적 생산대수 1억대 돌파’. 세계시장에서 휴대전화의 대명사로 통하는 핀란드 노키아의 한국생산법인인 노키아티엠씨(대표이사 이재욱 회장)를 설명하는 말이다. 1만개가 넘는 국내 진출 외국계 기업 가운데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에서 절대지존의 자리를 지키며 휴대전화 생산 메카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노키아티엠씨는 노키아 본사의 14개 해외공장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우량공장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지난 84년 한국에 처음 상륙해 이듬해인 85년 휴대전화 300여대를 생산한 이후 하루가 다르게 규모를 키워 휴대전화의 세계적인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규모 면에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구체적으로는 91년 생산누계 100만대를 돌파했으며, 98년 생산누계 2,000만대를 기록했다. 5년 전인 91년에 비해 20배나 성장했던 것. 이어 2000년 생산누계 5,000만대를 넘어섰고, 2001년에는 마침내 1억대를 돌파하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뒀다.생산 휴대폰 전량 해외수출노키아티엠씨는 외형뿐만 아니라 생산의 질적인 면에서도 최고를 자랑한다. 특히 94년 이후 단 한 건의 클레임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품질력을 과시하고 있다. 직원 1인당 매출규모도 약 40억원대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경남 마산에 본사를 두고 있는 노키아티엠씨는 생산하는 휴대전화 전량을 해외로 수출한다. 국내 시장에는 단 한 대도 판매하지 않는다. 이를 입증하듯 92년 연간 수출 1억달러, 98년 10억달러를 차례로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27억달러를 넘어섰다. 수출 면에서 92년 이후 9년 만에 27배가 넘는 성장을 이룬 셈이다. 주요 수출국가로는 미국, 호주, 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독일 등 아주 다양하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시장에 골고루 진출,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셈이다.뛰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그동안 상복도 많았다. 89년 26회 무역의 날에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89년과 92년 연속으로 ‘1억불 수출탑’과 ‘5억불 수출탑’을 받았다. 또 2000년에는 외국인투자기업상을 받았다. 지난해 38회 무역의 날에는 ‘20억불 수출탑’과 금탑산업훈장을 동시에 수상해 노키아티엠씨가 국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케 했다. 올해 1월에는 이 회사 이재욱 회장이 핀란드 대통령 1등 사자훈장을 받기도 했다.하지만 노키아티엠씨도 80년대 중반 국내 진출 초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이야 최우량 외국계 기업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마디로 몸살을 앓았던 것. 특히 노사갈등이 심해 생산성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곤 했다. 품질불량으로 수출물량이 반품되는 경우도 잦았다.하지만 이런 위기를 노키아티엠씨는 역설적이지만 노사간의 화합으로 극복했다. 이재욱 회장 이전 경영진들과 달리 이회장은 많은 대화를 통해 직원들을 설득시키고, 회사의 화합을 강조했다. 자신이 직접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공장을 돌며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직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결국 이회장 취임 1년이 지난 87년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노키아티엠씨는 급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이후 회사는 날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성장을 거듭했고, 생산과 수출 실적에서 각종 기록을 연이어 세웠다.노키아티엠씨는 국내에서 18년째 기업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도 활발히 전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보육시설과의 자매결연을 비롯해 선천성안면기형아 무료시술 등 봉사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또한 서울대와 창원대, 진주산업대 등과의 협력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해 기술 분야 산학협동에도 한몫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노키아티엠씨는 98년 이후 외국계 기업 가운데 매출액 면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결산기준일 기준으로 무려 3조4,700억원대의 매출액을 기록해 단연 수위를 차지했다. 2위를 차지한 한국휴렛팩커드의 1조2,009억원보다 3배 가까이 많다.최근 들어서는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당기순이익에서도 다른 외국계 기업의 추격을 따돌리고 1위를 독주하고 있다. 노키아티엠씨의 전성시대가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CEO 탐구 / 이재욱 회장한국식 ‘신바람경영’으로 진두지휘노키아티엠씨를 말할 때 이재욱 회장을 빼놓고 논하기 힘들다. 오늘날 최고의 외국계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이회장이기 때문이다. 한창 어려웠던 시절 위기를 돌파하고, 이후 90년대 들어 고속성장의 기반을 닦은 것 모두 이회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노키아티엠씨는 84년 한국에 들어온 이후 2년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 정도로 좌충우돌했다. 외국인투자가와 한국 경영자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됐고, 경영진의 일방적인 회사운영으로 근로자들의 불신도 극에 달했다. 자연 회사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때 최고경영자만 무려 3명이나 바뀌었다.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86년 이회장이 4대 대표이사에 올랐다. 취임 초기 떨어진 지상명령은 흩어진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 이에 그는 한국식 ‘신바람경영’을 내세워 직원들과 대화에 나섰다. 때로는 맏형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직원들을 감싸 안으면 위기를 함께 돌파하자고 호소했다. 생산라인에서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기도 했다.노사갈등으로 더 이상 회사가 휘청거려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까지 번지자 결과는 훌륭했다. 경영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직원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회사분위기는 급속도로 풀렸다. 특히 노사간의 잦은 대화는 직원들이 경영진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계기가 됐다.또 하나 이회장은 과감한 현금결제 방식으로 협력업체들의 신임을 얻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조치였고,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지만 이회장은 이를 고수했다. 대신 제품에 하자가 발생하면 거래중단 등의 조치를 내리는 등 제품관리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이회장 취임 1년 만인 87년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노키아티엠씨는 한국진출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거뒀다.이회장은 올해로 17년째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어찌 보면 장기집권을 하는 셈이지만 그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대한광학과 대우전자를 거쳤으며 사단법인 한국외국기업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