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억원 청구액 놓고 보험사와 천여건 소송중 … 실적 경쟁보다 돌다리 두드리는 자세 필요

국민은행이 지난해 ‘뉴오토론’에서 큰 손실을 입었을 때 다른 은행 자동차대출 담당자들은 ‘어휴 뜨거워라’ 하면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은행에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국민은행은 지난 2001년 2월부터 ‘뉴오토론’을 판매했다. 자동차를 구입하는 고객에게 최고 3,000만원까지 연리 9~10%로 보증인과 수수료 없이 대출해주는 것.당시 은행을 비롯해 카드사 등 각 금융사들이 너도나도 할부금융사의 텃밭에 도전장을 내고 자동차 구입자금 담보대출에 나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은행들은 할부금융사보다 낮은 금리를 앞세워 경쟁적으로 오토론을 출시했다.국민은행은 일부 경쟁은행들보다 늦었지만 공격적으로 영업에 나섬으로써 대형은행답게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6개월만 에 4,500억원의 대출실적을 기록한 것.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체율이 급증했다. 갈수록 상환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결국 국민은행은 8월 말 판매를 중단했다. 알고 보니 자동차전문 사기단에 속아 돈을 빌려준 것. 이들은 노숙자, 실직자 등 남의 이름을 도용해 대출을 받아 자동차를 구입한 후 차를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챙겼다.지금까지 수협공제에 국민은행이 청구한 보상액은 850억원, 건수로는 4,000여건이다. 판매는 중단됐지만 만기는 2004년까지이므로 부실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보험사에 지급을 청구하는 금액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국민은행은 이 상품을 내놓으면서 연체자들로부터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질 것에 대비해 삼성화재가 개발한 ‘저당물손실보상보험’에 가입했다. 연체자로부터 대출금 대신 자동차를 회수할 경우 경매로 처분하되 남은 손실은 삼성화재가 보상하고, 차량회수도 되지 않는 부실 채권에 대해서는 수협공제로부터 보험금을 지급받기로 계약했다. 수협공제는 다시 코리안리에 재보험(100%)을 들었고, 삼성화재(90%), 로열앤선얼라이언스(70%)가 다시 재보험을 인수했다.정작 대규모 부실이 발생하자 수협과 삼성화재, 로열앤선얼라이언스는 ‘지급할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민은행이 대출심사를 허술하게 했기 때문에 발생한 부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 수협과 삼성화재 등은 “국민은행의 일반 가계대출 연체율은 1~2% 수준에 불과한데 오토론 연체율은 10~42%”라면서 “국민은행이 심사를 제대로 했으면 모르되 마구잡이 식으로 대출을 해주고 책임을 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한편 국민은행은 “대우차영업소가 차를 팔면서 대출자격을 심사하고, 국민은행은 서류가 구비됐는지만 살피도록 삼성화재가 상품을 설계했는데 뒤늦게 딴소리”라는 것.보험금 청구와 관련해 1,000여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판결이 전혀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어느 쪽의 손실로 귀결될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공방을 벌이고 있는 국민은행이나 보험사들이나 달갑지 않은 경험인 것만은 사실이다.왜 실패했나국민은행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에 경쟁적으로 오토론 시장에 뛰어들었던 은행들은 현재 더 이상 오토론 상품을 팔지 않고 있다. 이미 판매된 것만 관리하고 있는 상황. 낮은 금리를 앞세워 의욕적으로 뛰어든 시장이었지만 모두 실패를 맛보고 물러난 것이다.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할부금융사의 영업력과 노하우를 무시하고 금리만으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게 패인”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구입자금 대출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자동차를 파는 딜러들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한데 은행들은 이를 간과했던 것. 한 마디로 시장에 대한 경험도 이해도 불충분했던 것으로 분석된다.자동차 구입자금을 대출받으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고, 충분한 고객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오토론 연체율은 은행의 일반 가계대출 연체율보다 높아지게 됐다. 은행들이 조금씩 몸을 사리기 시작했을 때 발생한 국민은행의 사건은 쐐기를 박았다. 이를 계기로 은행권은 오토론에서 한 발 빼고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수협측은 보험사가 손실보상을 해준다는 점만 믿고 과도하게 대출에 나섰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주장한다. “마구잡이로 대출을 해줬으니 이런 일이 생겼다”는 주장이고, 국민은행은 “삼성화재와 애초 상품설계가 그렇게 돼 있었다”는 얘기. 약관을 두고 논쟁이 붙은 것이다. 사이좋게 상품을 설계한 회사들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양쪽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약관을 확실하게 못박아 두지 않았거나 각자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동상이몽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정리된다.비슷한 시기 다른 은행들이 내놓았던 상품 역시 국민은행 것과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국민은행만 엄청난 부실률을 기록하게 된 것일까. 예컨대 조흥은행도 국민은행과 유사하게 차를 담보로 잡고, 고객이 서울보증보험의 보험료를 내게 해 자동차 구입자금을 대출해줬다.하지만 연체율이 높아지자 보증보험료가 올라가 할부금융사들과 비교해 금리 차이가 없어졌고, 이에 따라 대출심사도 까다로워져 상품경쟁력이 없어졌다. 그래서 점차 유명무실해지던 중 판매를 중단하게 됐다. 다시 말해 이처럼 다른 은행도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유독 국민은행만이 크게 ‘물린’ 것은 조심하지 않고 너무 많이 팔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민은행 한 지점장은 “근원을 따지고 보면 무리한 실적경쟁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말했다.이 상품은 통합 전 국민은행이 내놓았던 것으로, 지금은 소호여신팀 소속의 인력 4명이 사후처리에 부심하고 있다. 이미 대출된 돈의 연체율을 최대한 낮추거나 담보용 차를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소송에 매달리고 있는 것.어떻게 활용했나그럼에도 국민은행은 위축되지 않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선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영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호대출을 시작한 것이 이를 방증하는 사례. 마켓메이커로서의 위험을 감안하면서도 앞서 나가는 것을 꺼려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대출심사의 오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데 대한 자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부실률을 봐가며 보수적으로 대출하다가 2년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본격적으로 대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국민은행 홍보팀 관계자는 오토론과 관련해 “통합 전 이야기”라며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정리할 단계는 아니다”고 밝혔다. 소송에서 이겨 손실액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실패에서 배우는 교훈1. 규모가 때로는 짐이 될 수 있다.크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게에 제 발등을 찍히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2. 오만을 버려라경쟁자들의 상황이 못하다고 해서 어느 시장에서나 열세라는 법은 없다. 선점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3. 계약은 확실히 한다가장 기본이지만 사후에 문제가 생겨야만 깨닫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