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부터 수주 크게 늘어 … 해외건설 계약액 가운데 중동지역이 54% 차지
‘다시 중동이다!’IMF 위기 이후 큰 타격을 입었던 해외건설 시장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고 있다. 수주액 증가세가 뚜렷한 것은 물론 나락으로 떨어졌던 국제 신인도 역시 높아지는 추세다.특히 잃어버릴 뻔한 ‘황금텃밭’ 중동시장도 공략 강도를 높여 되찾아오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제2의 중동붐’ 도래를 조심스럽게 점칠 정도로 좋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황금텃밭 중동시장 되찾는다”올해 국내 건설업체들이 해외에서 따낼 수주액은 60억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이미 10월 말에 50억달러를 돌파, 99년 이후 처음으로 상승곡선을 긋고 있다.해외건설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월5일 현재 해외건설 계약건수는 111건, 수주액은 53억3,092만달러 규모다. 지난해 같은 기간 실적인 65건, 34억5,362만달러에 비해 건수로는 70.7%, 금액으로는 54.3%가 늘어난 수치다.특히 중동에서의 실적이 두드러진다. 올해 총 계약금액 가운데 중동은 28억8,943만달러를 기록해 전체의 54.2%를 차지했다. 특이한 것은 계약건수로는 전체의 19%에 불과하다는 것. 그만큼 중동에서 발주되는 프로젝트 규모가 크다는 이야기다. 건수는 그리 많지 않아도 ‘씨알’이 굵은 게 중동시장의 매력이기도 하다.업체별로는 현대건설이 이란 사우스파 가스전 개발 4~5단계 공사를 12억780만달러에 수주한 것을 비롯해 쿠웨이트, UAE, 카타르, 리비아 등에서 14억7,900만달러 공사를 수주했다. LG건설도 이란, 리비아 등에서 9억3,446만달러 공사를 따냈다. 대우건설(2억296만달러), 삼성물산(1억2,239만달러) 역시 중동에서 좋은 실적을 올렸다.건설업계는 이 같은 성과를 제2의 중동붐, 나아가 해외건설 부활을 알리는 청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IMF 위기 이후 토목, 건축 등 단순 시공의 비중이 크게 줄고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플랜트 건설 수주가 눈에 띄게 늘고 있어 수익성 개선, 해외건설산업 체질개선도 한껏 기대하는 중이다.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불과 2년 전 만해도 요원한 것이었다. 어느 업체라 할 것 없이 수주경쟁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심지어 따놓은 공사까지 반납하는 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다. 언제쯤 형편이 나아질지 예측하는 이도 거의 없었다.외국 경쟁업체 음해성 문서 뿌리기도“발주처들이 워크아웃(Work-Out) 제도를 ‘퇴장하다’(Walk Out)라는 의미로 이해하더군요. 부실한 기업에 일을 줄 수 없다는 발주처를 설득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건설사 브랜드가 곧 보증수표였던 때는 완전히 지나갔구나 했었지요.”(대우건설 관계자)“외국 경쟁업체에서는 국내 기업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만드는 기사만 모아 발주처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한국 업체에 수주결정이 났는데도 발주처를 흔들어 일을 빼앗아가겠다는 발상이었죠. 그간 쌓아놓은 실적과 신뢰가 없었다면 공사를 놓칠 뻔한 일이 많았습니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해외건설 수주의 50% 이상을 차지해 왔던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로 비틀거리기 시작한 2000년을 고비로 국내 건설업체들의 국제 신인도는 하락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0대 건설업체 가운데 40%가 관리대상업체로 지정됐고 해외건설 수주실적 상위 10개 업체 가운데 4개 업체가 법정관리, 워크아웃, 화의 등 비정상적인 경영상태가 됐기 때문이다.사실 해외건설 시장의 갑작스러운 퇴조는 정부도 예측하지 못했다. 99년 12월 건설교통부가 배포한 ‘해외건설 IMF 위기 극복’이라는 자료는 2000년부터 오히려 해외건설이 뚜렷한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며 정반대의 예상을 내놓았을 정도였다.하지만 당시 중동의 한 국가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해 국내 건설업체들의 실상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갔고 오랫동안 국토개발 파트너로 삼았던 건설사를 외국 건설업체 명단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또 최저가로 낙찰받은 공사에 대해서도 정부, 금융기관의 추가보증을 요구해 왔다. 외국 경쟁업체들은 한국 건설업체를 음해하는 문건을 발주처에 뿌려 어려움을 더했다.해외시장을 놓을 수 없었던 건설업체들은 발주처를 안심시킬 보증서를 부탁하러 정부부처로, 금융기관으로 뛰어다녔다. 어떤 업체는 한 프로젝트에 보증서를 10통 이상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국내외 실적과 최근 동향을 담은 영문 소개책자를 새로 만든 곳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심사에서 탈락해 아예 입찰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건설업계 경영난이 계속되자 해외건설 활동을 지원하는 해외건설협회 역시 사정이 어려워져 90명에 이르던 직원을 30여명으로 대폭 줄여야 했다. ‘건설한국의 신화는 끝났다’는 탄식이 영락없이 실제상황으로 이어지는 듯했다.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상황이 다시 변하고 있다. ‘플랜트 건설’이라는 틈새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 새로운 기반을 닦고 있는 것이다. 플랜트 건설은 과거 주력했던 단순 시공보다 훨씬 부가가치가 높다. 이제 중동 산유국들은 한국 건설업체의 플랜트 건설 각축장으로 바뀌는 모습이다.‘해외건설=플랜트 건설’플랜트 건설이란 기계장치, 전기ㆍ통신 등을 포함한 종합생산시설 건설을 뜻한다. 이중에서도 국내 건설업체가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가스석유화학산업의 다운스트림(Down-Stream). 즉 시추 이후 원유수송부터 정제, 판매까지 담당할 기반 시설을 만드는 일이다.현대건설이 지난 3월 수주한 이란 사우스파 가스전 4~5단계 개발공사의 경우 페르시아만 해상의 사우스파 가스전으로부터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옮겨지는 천연가스 혼합물에서 유황, 염분, 수분 등을 제거해 연료로 사용되는 세일즈 가스(메탄) 등을 생산하는 시설을 만드는 일이다. 현대는 이 공사를 12억달러(약 1조5,600억원)에 수주, 공사비 전액을 현금으로 수령하기로 하고 선수금으로 8,400만달러(약 1,092억원)를 받는 조건에 계약했다.플랜트 건설 수주의 증가는 해외건설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뜻한다. 그동안 주력해 왔던 단순 시공 분야는 중동 현지 기술력으로 충당이 가능한데다 중국 건설업체의 저가공략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태다. 이미 가격과 기술력, 노동력에서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반면 최근 중동지역 산유국들은 단순히 원유를 시추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이를 가공ㆍ정제해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꿨다. 자연스럽게 원유가공시설 공사발주가 늘어났고 국내 건설업체가 이 시장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플랜트 설계에서부터 자재구매, 시공까지 모든 공정을 통째로 맡는 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분야에서는 선진국 업체들과 대등한 기술력을 자랑한다는 평이다. 김종현 해외건설협회 플랜트지원실 차장은 “이미 해외건설은 곧 플랜트 건설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로 바뀌었다. 특히 이란, 리비아 석유 가스 관련 플랜트 건설 시장은 전망이 밝다”고 밝혔다.하지만 중동 플랜트 건설 시장의 특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부, 금융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소재오 해외건설협회 전무는 “첨단기술 확보 면에서는 여전히 선진국에 크게 못미치는 수준이다. 중동 플랜트 건설 시장을 안전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핵심기술 흡수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돋보기 / 중동으로 가는 건설맨들봉급 국내보다 1.5~1.8배 높아75년부터 85년까지 중동은 한국경제를 지지하는 금맥이었다. 20만명 이상의 근로자가 사우디, 이란 등 열사(熱沙)로 나가 돈을 벌었고 이는 곧 국내 경제발전의 윤활유가 되었다.당시 중동현장에 나가는 근로자들의 봉급은 국내 근로자의 2.5배에 이르렀다. 3~4년 정도 나가면 밑천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가장들이 중동행 비행기를 탔다.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중동으로 가는 건설맨이 늘고 있다. 하지만 속내는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동 근로자들의 역할은 도로, 항만 등 건설현장에서 직접 노동력을 파는 것이었지만 요즘 파견되는 건설맨은 건설관리 담당자가 대부분이다. 사업비 절감을 위해 현장 노동인력은 동남아 등 제3국에서 데려오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에서는 북한에서 근로자를 데려다 쓰기도 한다는 후문.중동으로 나가는 건설맨들은 국내보다 1.5~1.8배 높은 봉급을 받는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지원자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특징. 사우디, UAE 등의 생활환경이 좋은 대도시는 경쟁률이 높지만 리비아, 이란 등의 사막지대로 나가야 할 경우에는 적임자를 찾기 어렵다는 게 건설업체의 공통된 고민이다. 그래서 오지로 나가는 인력은 대부분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있다.중동지역 공략을 위해 직원들에게 영어공부를 시키는 회사도 있다. 울트라건설(옛 유원건설)은 군대식 영어교육을 동원, 직원들에게 능숙한 영어회화 실력을 요구하고 있다. LG건설, 삼성물산 건설부문 등도 해외건설 수주 증가를 염두에 두고 직원들 영어교육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