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영어공부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뭐 지금 당장 달라지는 게 있겠어요?”“그래도 외국인 임원들한테 보고라도 하려면 영어로 해야 할 거 아냐.”영국계 다국적 광고회사 WPP에 회사가 인수됐다는 발표가 난 지 일주일 가량 지난 12월10일 점심시간.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LG애드 직원 몇 명이 회사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국내 2위의 광고대행사가 외국기업으로 넘어갔다며 호들갑스러운 주위 반응과 달리 이들은 새로운 기회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나타냈다.이번 WPP의 LG애드 인수를 계기로 국내 광고시장은 외국계 기업이 점유율 면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이를 두고 요즘 광고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한국광고데이터(KADD)가 발표한 3/4분기 광고비 분석자료에 따르면 점유율 1위 제일기획과 2위 LG애드, 그리고 4위의 대홍기획, 9위 코래드를 제외한 6개사가 외국계 광고회사였다. 여기에 최근 LG애드까지 외국회사 대열에 합류하면서 상위 10개사 중 7개를 외국계 회사가 차지하게 됐다.이는 상위 10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광고시장의 60% 이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3/4분기 1~10위까지의 점유율은 전년 동기 대비 0.7%포인트 증가해 상위 10위권 내 광고회사들의 시장점유율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임을 보여줬다. 이 기간 중 성장률은 1~10위 28.2%, 1~20위 26.3%, 1~50위 18.5%를 기록했다.매력적인 광고시장, 한국그렇다면 외국계 광고회사들이 하나둘씩 한국에 자리를 잡는 이유는 뭘까.우선 외국계 기업의 국내 진출이 활발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시장개방이 가속화되고 외국계 기업들이 밀려들면서 이들을 광고주로 잡기 위해서는 광고회사들이 함께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 세계 광고시장은 인수ㆍ합병이 활발해 막강한 네트워크를 갖춘 대형 회사들 위주로 움직이는 추세여서 한국 광고시장도 이를 피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김상준 한국광고단체연합회 사무국장은 “지주회사처럼 몇 개의 광고대행사를 거느린 엄청난 규모의 광고회사들이 계속해서 인수ㆍ합병을 추진하는 것이 최근 트렌드”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광고시장은 그동안 개방의 물결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이제 광고시장에서 외국계와 국내 토종기업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한국 광고산업의 성장속도 역시 외국계 기업들에 한국시장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한국 광고시장이 2002년 말 기준으로 6조1,000억원대를 형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세계 10위권의 규모로 광고시장 초창기인 70년에 국내 총광고비가 127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30년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지난 4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가 발표한 2001년 광고시장 현황 자료에서도 서울은 미국 이외에 광고산업 규모가 큰 순서대로 상위 15개 도시를 꼽은 자료에서 12위에 랭크됐다. 국내 업체들이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외국계 회사의 국내 진출은 피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실제로 외국계 회사들은 이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미국계 광고회사인 TBWA는 지난 6월 ‘붉은 악마’ 캠페인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회사는 캠페인 내용을 책자로 만들어 홍콩에 있는 아시아ㆍ태평양 지국에 보냈다. 이것이 뉴욕에 있는 본사를 통해 81개국에 형성돼 있는 네트워크로 퍼져나가면서 국내 현실에 낯선 외국기업들도 이 회사를 인지하게 됐다는 것.하지만 외국계 기업들이 한국 광고시장을 안정적인 수익원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광고회사의 수익은 결국 매체수수료에서 얻게 되는 것”이라며 “한국방송광고공사라는 국영 미디어렙이 있는 한국만큼 안정적인 시장이 또 있겠느냐”고 말했다.어떤 회사들이 들어와 있나현재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광고회사는 20개 정도다. 특히 이 가운데 LG애드(2위)를 비롯해 금강기획(3위), TBWA코리아(3위), 휘닉스커뮤니케이션(5위), 금강기획(6위), 웰커뮤니케이션(7위), WPPMC코리아(8위), BBDO동방(10위), 리앤디디비(11위), 유니버설멕켄코리아(12위), 하쿠호도제일(14위), 피디에스미디어(20위) 등은 상위 20위 안에 포진하며 국내 광고업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이중 독자적으로 설립된 회사는 미국계인 12위의 유니버설멕켄코리아뿐이고 나머지는 합작이나 지분참여 형식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특히 합작이나 지분참여를 통해 세계 10위권 내에 드는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회사들이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다.애드버타이징 에이지의 2001년도 현황조사에서 이번에 LG애드를 인수한 영국계 WPP그룹은 미국 굴지의 회사인 인터퍼블릭그룹을 누르고 1위에 올랐었다. 또 웰커뮤니케이션과 손을 잡은 퍼블리시스그룹은 3위에, 제일기획과 합작한 하쿠호도는 9위를 기록했다.외국계 광고회사들의 활약상올해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준 외국계 광고회사는 단연 TBWA코리아다. 지난 99년 업계 순위 7위였던 이 회사는 2000년에 6위, 지난해 5위로 한 계단씩 상승하더니 지난 3/4분기 실적에서는 국내 토종기업인 대홍기획을 누르고 3위에 등극했다.TBWA의 3/4분기 취급액은 4,810억원으로 점유율 7.3%를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35%의 성장률을 보였다. 여기에는 SK계열사였던 태광멀티애드를 인수해 SK텔레콤이라는 대형 광고주를 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붉은 악마’ ‘June’ 등의 인상적인 히트작들을 내놓으며 히트메이커로서의 이미지를 다진 것도 한몫 했다는 분석이다.그밖에도 4개사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나타낸 WPPMC코리아(10위권 진입), 152위에서 51위에 오른 그레이월드와이드코리아, 84위에서 25위로 껑충 뛴 유로넥스트, 40위권에서 30위권으로 올라선 덴츠이노벡 등의 성장률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사실 외국계 광고회사들의 활약은 실적 자체보다 한국 광고시장의 트렌드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외국의 선진기법과 노하우를 들여올 수 있다는 점은 이들 외국계 기업이 한국 광고시장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다. 국내 광고회사들이 다양한 매체계획기법에 주목하게 된 것이나 완전경쟁 시스템을 통한 더 나은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하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그 때문인지 최근 광고업계에서 매체 파트는 주목받는 분야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LG애드는 한국형 미디어 컨설팅 시스템인 엠팝스(M.POPS)를 지난 4월 독자적으로 개발했고, 비슷한 시기에 세계 최대 광고매체대행사인 캐러트가 한국에 상륙하기도 했다.하지만 한국 광고산업을 이끌 ‘사관학교’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은 외국계 광고회사들이 국내 시장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리콤이나 제일기획 같은 국내 토종 광고회사들은 그동안 공채를 통해 발굴한 인재를 필요한 자원으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외국계 회사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국내 광고시장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계 회사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국내 광고시장의 흐름을 바꾸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른 업종이 그러하듯 국내 광고산업도 외국계 기업의 진출로 인한 성장의 과도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광고업은 고부가가치의 서비스산업인 만큼 시장잠식의 여파가 다른 업종에 비해 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결국 국내에 발을 들여놓은 외국계 광고회사들의 자세야말로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를 국제결혼이라는 말로 설명했다.“국제결혼을 해서 잘 살려면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하잖아요. 또 상대 나라의 일을 내 일같이 생각해야 하고요. 외국회사들이 국내에 재투자하는 노력을 잊지 않는다면 외국계 회사들의 국내 진출은 우리나라 광고시장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