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가 원래 급진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급진적 방법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굳이 두 가지를 구분할 실익은 없다. 요즘은 근본주의라는 말이 대부분 ‘이슬람’이라는 말과 짝을 이뤄 사용되지만 본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스스로를 지칭한 말로 사용했었다. 실리보다 원리, 변용보다 원형을 중시하는 태도를 근본주의라 한다면 나라와 사상을 불문하고 근본주의적 요소는 어디서든 쉽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아마도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유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었던 나라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생각의 ‘근본’을 주자학에 두었던 만큼 조선, 특히 후기사회는 근본주의의 함정에 스스로를 밀어넣어 변화와 변용을 거부하고 오직 주자를 모시고 명나라를 섬기는 ‘사상적 외통수’에 걸렸던 시기라고 할 만하다. 송시열이 대표적인 경우다.중국 섬기기를 외교가 아닌 종교화하고 주자(朱子)에서 일획도 고칠 수 없다며 반대파는 곧바로 사문난적으로 몰았으니 조선은 점차 석고처럼 굳어진 끝에 급기야 망해버리고 말았다. 제사상의 음식과 접시를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지가 얼굴 붉히며 다툴 주제가 됐으니 그 어리석음은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재미있는 것은 근본주의는 대개 사상이 대물림되고 세속화(世俗化)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보다 주자에서 근본주의적 성향이 더욱 강화돼 나타나고, 예수보다 기독교단이 더욱 근본주의적이기 마련이다. 레닌보다 스탈린이 더욱 그렇고, 홍군보다 홍위병에서 근본주의적 무절제가 강력하게 발휘된다.원래 추종자라는 것은 그런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근본주의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소위 ‘개혁 이데올로기’가 갈수록 근본주의적 경향, 다시 말해 추종세력들의 슬로건화하고 있지 않은가 해서다. 더구나 대통령선거 기간이 되면서 그 토양도 더욱 비옥해지고 있다.‘안티조선’ 같은 사고가 대통령후보를 통해 정당화되고, 개혁이라는 이름만 걸면 어떤 사고의 미성숙도 용서가 되고 있다. 사회를 특권층과 서민층으로 이분화하는 허위의식도 개혁의 골격을 이루고, 여기에는 기업투명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몸을 숨긴 ‘반기업 정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자영업자 가운데 몇 %가 세금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들의 세금을 절반으로 낮추겠다는 공약이 놀랍게도 집권당 후보에 의해 내걸린다. 고소득 자영업자의 대표격인 고급 일식집 주인이 “우리 서민들이…”라며 맞장구를 치는, 자기인식이 뒤죽박죽인 나라에서 과연 누가 진짜 서민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근로자와 농민을 살리는 길인지에 대한 ‘진지한 사고’는 봉쇄된다.‘우리 농업은 좋은 것이야’ 식의 근본주의적 태도를 세우고 나면 진정한 농업구조조정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농업보호를 위해 엄청난 돈을 퍼붓게 되고 농민들은 다시 거대한 빚더미에 올라앉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구호들이 먹혀드는, 실로 우스꽝스러운 지적 수준의 나라가 근본주의 추종자들이 횡행하는 이 나라의 면목이다.그러니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반서민이요, 반개혁, 반농민, 보수반동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낙인을 찍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최근에는 정부 고위관료 출신을 포함한 일단의 한가한 인사들이 민간기업 이사들을 교육시키겠다며 협회를 만들기도 했다.기업은 죄인이니 ‘삼청교육대’에라도 보내려고 할지 모르겠다. 경쟁하는 기업세계에서 실력을 쌓아온 사람들이 한참 웃을 일이다. 누가 누구를 교육시키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개혁 명분을 내건 홍위병들의 철없는 행진을 이제는 그만 보았으면 하지만 진짜 서민, 진정으로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