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둔산지구 중심으로 인구 크게 늘어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정부수립 이후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옛 중앙청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국내 행정기관은 수도권 인구분산을 목적으로 82년에는 과천으로, 97년에는 대전으로 꾸준히 이동해 왔다.본격적인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맞아 그 선례로서 과천과 대전의 변화상을 짚어봤다.‘과천 제2청사 시대’지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 일대는 ‘개벽’에 가까운 몸살을 겪었다.‘과천일대 대공원 조성’(1977년 1월11일)‘과천에 제2종합청사’(1978년 1월11일)‘과천, 인구 4만5,000 전원도시로’(1979년 10월10일)매년 과천은 일간지 1면을 장식하며 변화의 조짐을 보였고, 그 과정에서 몸살의 진통을 겪는 보도도 잇따라 나왔다.‘과천 땅값의 책임’(1978년 1월15일)‘과천에도 투기바람’(1981년 9월9일)최근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이라는 이슈와 관련해 나타나고 있는 각종 현상들은 흥미롭게도 과천에 제2정부청사가 들어설 때인 약 20년 전 상황과 닮았다.우선 장기적인 대책을 알리는 정부의 발표가 나온 뒤 부동산투자자들의 관심으로 인해 폭등한 땅값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진 것은 70년대 말이나 2000년대나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인 듯하다.600년간 19대째 과천에 살고 있다는 최종수 과천향토사연구회장은 이 같은 당시 상황을 경험을 토대로 증언해 주었다.“77년 1월11일이죠. 날짜까지 기억하는데 대공원이 들어선다는 기사가 났어요. 부지는 정부에서 모두 수용한다고 했었죠. 그때 제가 대지를 평당 6,000원에 팔았는데 1년 후에 청사가 들어선다고 발표가 났을 때는 같은 지역이 평당 8만~10만원을 호가한다고 하더군요.”특히 재테크수단이 다양하지 못했던 지난 70년대는 정부의 발표가 있을 때마다 휩쓸려 다니던 투자자들이 많았던 시기. 이런 까닭에 78년에는 3일 간격으로 나온 정부발표로 인해 새로 산 땅을 도로 물려달라는 투자자들이 중개업소로 몰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부가 종합청사 부지로 결정됐던 곳의 일부를 생산녹지로 지정한다고 3일 만에 말을 바꿔 생긴 일로, 이는 당시 일간지 칼럼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79년 4월에 첫 삽을 뜬 종합청사 공사는 82년 여름에 제1동 청사의 모습을 드러냈고 과천은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보건사회부와 과학기술처가 과천 입주 1호를 기록했다. 전원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아파트와 연립주택 건설사업이 착공된 것도 79년. 역시 81년 말까지 3년 사이에 중ㆍ고교가 신축되고 5,700가구의 주택이 들어섰다.과천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바로 이 즈음까지다. 83년 7월, 당시 언론은 69만6,000평의 신도시개발지역 내 인구가 처음 5,000명에서 5만4,000여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고 전하고 있다.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과천의 변화는 현재 논의되는 행정수도와는 궤를 달리 한다. 지금의 행정수도 이전논의가 순수하게 행정기관 이전을 다루는 반면, 과천은 정부청사 설립과 신도시개발계획이 교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큰 폭의 변화는 찾기 어렵다.지난 86년 1월1일자로 시로 승격된 과천시는 매년 통계연보를 발표하는데 이 자료에 따라 82년부터 현재까지 과천의 변화상을 체크해볼 수 있다. 우선 인구만 보더라도 82년 4만1,000여명에서 83년 6만1,000여명으로 변화를 보인 뒤 이후로는 꾸준히 6만~7만명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오히려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변화들은 행정기관의 이동과 함께 주변상가와 주거환경이 달라지면서 나타난 미미한 사건들이다. 새로 지어진 4개동의 청사에 경제기획원(재정경제부로 통합)까지 입주를 마친 게 86년 2월. 이때까지 주로 나왔던 이야기들은 식당 등 상가시설의 부족문제였다. 공무원들이 대거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밀려드는 민원인까지 소화하기에는 주변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당시 상가분양은 57대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낳기도 했다.장관연락실의 유행도 빼놓을 수 없는 80년대 당시 과천에 나타난 변화. 장관들이 국무회의나 국회참석 때 업무연락을 하거나 시간절약을 위한 대기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서울 도심에 연락실을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번 행정수도 충청이전 논의에서는 국회의 이동까지 함께 거론되고 있어 이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과천의 서울시내전화 편입 소식도 신문지면을 크게 장식했다. 과천지역상주인구의 80%가 서울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3분 한 통화에 280원을 지불하던 것을 85년 7월부터 서울시내요금과 동일한 20원을 내게 했다.현재 과천시는 일명 ‘서울시 과천구’로 불릴 만큼 서울과 거리상, 외관상 매우 닮은 모습이다. 서울 사당동과 과천을 잇는 사당 - 남태령 구간은 이미 80년대 후반에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94년에는 서울지하철 4호선과 수도권 전철 안산선을 연결하는 과천선이 개통됐다. 82년에 1개의 초등학교와 2개의 중학교만이 있었던 교육환경은 4개 초등학교와 2개 중학교, 4개의 고등학교 보유로 달라졌다.계획도시 과천은 정부청사와 주거지역, 상가지역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현재 중심상가지역의 땅값이 평당 2,000만원을 호가한다는 게 부동산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수도권 인구분산정책으로 확실한 수혜를 입은 과천 주민들은 요즘에는 오히려 인구분산정책으로 나온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으로 인한 과천 땅값 하락을 걱정하는 아이러니에 빠져있다.대전의 ‘뜨는 동네’ 둔산5살 남짓 된 대전시의 ‘뜨는 동네’ 둔산지구는 지난 97년 말 완공된 정부 제3청사가 위치한 대전시 서구 둔산동 920번지 일대를 말한다. 정부주도로 개발된 과천과 달리 공사가 시작된 지난 93년부터 정부청사 특수를 노린 오피스텔, 대형 할인매장, 음식점 등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청사를 중심으로 활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본격적인 공무원들의 입주를 앞둔 시기였던 98년 초에는 대전 전체의 경제발전을 바라는 시민들의 기대로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도 했다.‘지상 20층 높이 4개동’ ‘단일 공공청사 국내 최대규모’ ‘인텔리전트빌딩’ 등 화려한 수식어를 자랑하며 시작된 대전시대는 생각보다 강력한 경제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상당하다.하지만 둔산지구가 이룬 가장 큰 성과는 철새가 아닌 대전광역시 인구를 늘려놓았다는 점. 인구 140만명으로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며 주택보급률이 96.2%에 달한다는 통계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미 첨단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대전이었지만 그동안 주중에는 대전에서 주말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철새족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대전은 남한지역의 중심에 해당하는데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수도권과 영호남의 가운데 지역이어서인지 박정희 정권 말에 이미 행정수도로 계획되었다가 백지화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전지역의 개발은 대규모로 이뤄져 왔다. 과천과 달리 대학도 17개나 위치해 있다.결국 정부청사 특수 이전에 이미 개발의 요건을 갖추고 있던 대전은 오히려 ‘살맛 나는 아기자기함’이 부족하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