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로 98년 3월 뜻하지 않게 27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은행을 떠나야만 했던 김세돈씨(54). 당시만 해도 금리가 20%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당연히 퇴직금 2억5,000만원을 금융기관에 맡겨두고 월 400만~500만원의 이자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퇴직금 외에 준비해 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김씨는 별 걱정 없이 회사를 나왔다.하지만 김씨의 예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빗나가고 말았다. 금리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고 생활비를 마련해 볼 생각으로 시작했던 주식투자에서는 2,000만원이 넘게 손해를 봤다.“벌면서 쓰는 것과 목돈을 빼 쓰는 것은 천양지차이더군요. 생활비와 애들 대학등록금 등으로 월 평균 300만원씩 곶감 빼 먹듯 썼더니 3년 만에 1억원이 없어졌어요. 퇴직금의 40%가 사라졌으니 막막했죠.” 돈뿐만 아니라 2년 넘게 일자리 없이 지내면서 생활리듬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니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창업을 생각해 봤지만 실패할 확률로 높고 적성도 맞지 않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100만원을 받더라도 출퇴근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친척 소개로 정선에 공장을 둔 식품회사의 영업을 맡게 됐다. 몇 만명의 큰 조직에서 지점장까지 하면서 대우를 잘 받다가 영세한 회사의 영업일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열심히 뛰어다녔다.그러나 어렵사리 시작한 김씨의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6개월 동안 월급을 한푼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접고 말았다.눈높이를 낮추면 길이 보인다“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눈높이가 낮춰졌죠.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일할 수 있는 길도 보였어요.”자신의 나이와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주택관리사와 부동산중개사였다. 자기사업처럼 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사보다 월급쟁이로 다닐 수 있는 주택관리사에 더 끌렸다. 게다가 퇴직한 뒤 동대표를 맡으면서 아파트 관리소장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는 자신감도 있었다. 6개월 동안 학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해 2000년 말에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땄다.김씨는 자격증을 따자마자 서울에 있는 100여개의 아파트 위탁관리업체 가운데 15군데에 이력서를 내고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200세대의 소단지 아파트에서 경리업무까지 할 수 있는 관리소장을 구한다는 것이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김씨가 바로 적임자였다.“생각보다 월급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돈을 떠나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합니다.” 김씨의 월 손익계산서는 아직은 마이너스다. 현재 급여는 170만원. 이중 생활비로 150만원을 쓰고 20만원은 본인 용돈으로 쓰고 있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두 자녀의 등록금과 매월 넣는 보험료는 여전히 저축은행에 넣어둔 퇴직금의 이자와 원금에서 빼 쓰고 있다.김씨는 자녀들이 대학을 마치고, 국민연금도 받게 되면 경제적 부담은 덜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사실 김씨는 젊었을 때 미래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후준비도 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는 것도 싫어서 보험도 종신 같은 배당형보다 저축형만 들었다. 그러던 그가 고통스러웠던 명예퇴직 후 2년간의 실직생활을 경험하면서 변한 것이다.“70세까지 일할 생각입니다. 주택관리사는 정년이 없다고들 하지만 60세를 넘기면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에 대비해서 부동산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하려고 해요. 중개사 업무가 어렵다면 비교적 일자리가 많은 경비도 할 겁니다.” 늦게나마 자신에게 맞는 나름대로의 노후계획을 짠 김씨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엿보인다.부동산 펜션 사업 / 정성호 제일은행 부팀장부동산 펜션으로 월 300만원 ‘거뜬’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제일은행에서 50%의 행원을 감축했습니다. 내가 퇴직 대상이 될지 동료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죠.”정성호 제일은행 고객서비스센터 CSC여신사후관리팀 부팀장(51)은 그후에도 정리해고 위기를 4~5차례 겪었다. ‘은행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은 순식간에 깨졌다. 50대 이후를 어떻게 보낼지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45세 이후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먼저 창업을 검토했지만 무경험 상태에서는 실패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내와 현재 고2, 고3학생인 두 아들에게 더 이상 은행에 다닐 수 없으니 살길을 함께 생각해 보자고 말했죠.”자녀들은 “은행장님께 하소연해 보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의 실직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퇴직 위기감을 숨기려는 다른 가장들과 달리 정부팀장은 가족과 함께 퇴직 이후 생활을 털어놓고 의논했다.“50대 퇴직해도 연간 3,000만원, 월간 250만원이 최소 자금으로 필요할 것이고 계산했죠.”부동산임대업이나 고시원, 독서실 등 부동산투자도 검토했다. 그러나 투자규모가 크다는 단점을 감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결국 정부팀장은 2001년 봄부터 펜션 등 민박사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감안해 전원생활을 하면서도 동시에 투숙객을 받아 생활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3년 전 중간정산퇴직금으로 받은 2억5,000만원을 펜션에 투자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인터넷 사이트를 샅샅이 뒤지며 토지매물이 나오면 부인과 주말마다 현지답사를 다녔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서울에서도 수시로 관리가 가능하도록 1시간 떨어진 가평과 양평, 여주, 용인, 이천, 남양주 등을 대상지역으로 검토했다.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에 착안해 경기도 가평읍 용추계곡 내의 토지를 매입했다. 452평 맹지(도로에 접하는 부분이 없는 땅)와 주택용지 작업이 완료된 인접대지 110평을 1억원에 산 것. 그중 300평을 주택용도로 전용허가를 받았다.“가평토지에 펜션을 짓는 것은 곧 포기했습니다. 주변에서 민박을 하시는 분들이 여름철에만 손님이 집중돼 안정된 수입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조언을 하더군요.”결국 가평토지는 남겨둔 채 퇴직금 중 남은 돈으로 다른 토지를 매입하기로 했다. 부인의 고향인 강릉 주변의 수익성높은 토지매물을 인터넷에서 계속 검색했다. 결국 강원도 봉평면 흥정계곡 인근 지역에 매물이 나온 것을 보고 중개인과 접촉했다.이번에는 민박으로 고정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을 잘 둘러봤다. 봉평대지 앞에는 흥정계곡이 흐르고 3㎞ 상류에는 관광농장인 ‘허브나라’가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을 민박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전 1,000평을 평당 10만원에 총 1억원을 주고 2002년 1월 매입했다. 그후 4월까지 250평을 주택용도로 전용허가를 받았다.“제주도 표선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동료의 도움도 받고 각종 전원주택 박람회에 수차례 다녀온 후 통나무집과 장단점을 면밀히 비교한 후 목조주택으로 짓기로 결정했습니다.”건축비는 평당 260만원, 대지로 확보한 250평에 1억5,000만원을 들여 지었다. 이 부분은 마이너스 통장을 이용했다. 퇴직한 후 나올 1억5,000여만원의 퇴직금으로 갚을 계획이다.지난해 11월 완공된 봉평의 펜션(www.polarispension.com)은 4채 규모다. 20평 2채, 10평 2채로 이뤄졌다. 펜션의 이름은 5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친인척에게 공모했다. 중학교 여교사인 20대 처조카가 ‘폴라리스’(북극성)라는 이름을 공모해 당첨됐다. 펜션에서 북극성이 올려다 보인다는 것을 감안한 이름이다.“폴라리스펜션의 문을 연 11월 직후부터 월 300만원의 순수익이 발생해 놀랐습니다. 대지 자체도 평당 20만원 이상으로 2배 올랐죠. 펜션 투숙객에게는 1박에 8만~12만원을 받고 있어요. 토지를 매입할 때는 고려하지 못했는데 13㎞ 인근에 스키장 ‘보광휘닉스파크’가 위치하고 있었던 거죠. 늘어가는 스키인구에 비해 스키장의 숙박시설이 모자라 펜션에 묵는 스키어가 많아졌답니다.”땅도 난생 처음 사 봤고 펜션 민박건축과 홍보도 처음 해본 정부팀장은 손님이 비운방을 청소를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새인생이 열렸다는 기쁨에 힘든 것도 잊는다. 대규모 펜션과 경쟁하기 위해, 가족처럼 따뜻하게 손님을 맞아 단골로 만들 계획이다.“퇴직 후에는 펜션 옆에 가족이 살 전원주택을 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