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판매로 시작, 국내 1호 시계공장 세우고 자체 브랜드 개발…올 매출 250억원 목표

포체(FOCE). 아직 명품브랜드 반열에는 끼지 못한다. 하지만 패션시계 분야에서는 상당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다. 톡톡 튀는 디자인과 소비자를 유혹하는 고급스러움이 포체의 매력. 소비자들은 포체를 보면 한 번쯤 손목에 차고 싶다는 반응을 보인다. 20여개국에 수출도 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포체’가 패션시계 브랜드로 정착한 데는 40년 동안 시계 하나만을 연구해 온 아동산업(대표 김종수·49)의 고집스러운 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아동산업의 출발은 지난 1963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친인 김창규 회장(1993년 작고)이 서울 회현동에서 직원 10여명을 데리고 회사문을 열면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따리 장사 수준으로 시계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팔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시계생산을 못하던 때였다. 시계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시절이라 시계의 인기는 대단했다.시계판매를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던 아동산업은 1960년대 후반 큰 고비를 맞는다. 정부가 외화유출 방지를 이유로 시계를 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한 것. 회사문을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회장의 사업수완이 발휘된다.웬만한 사람 같으면 회사문을 닫고 다른 사업을 구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시계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수입중단 이후 커가는 국내 시계밀수 시장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made in korea’를 자기 손으로 새겨 넣은 시계를 만들겠다는 각오였다.김회장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경기도 부평에 1,000평의 땅을 사 시계공장을 세웠다. 1968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무브먼트는 수입해 오고 케이스, 줄 등 외장은 직접 만들어 조립했다. 국내 시계생산공장 1호였다. 달러를 벌 목적으로 내수는 않고 수출만 했다. 미국, 파나마, 멕시코 등지로 전량 수출했다. 얼굴 없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이었다.하지만 OEM은 외풍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한동안 잘되던 수출이 1980년대 남미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완전 중단되고 말았다.장남인 김종수 대표는 “당시 아버지가 고전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만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접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회사에 들어와 생산, 무역 등 온갖 궂은일부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동안 해 온 OEM 수출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브랜드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매출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2년 동안 브랜드 개발에 매달렸다. 이렇게 해서 내놓은 브랜드가 웨스타(WESTAR)이다.김대표는 1982년 말께 웨스타 브랜드를 붙인 시계 샘플을 들고 중동으로 날아갔다. 당시 중동은 개발 붐을 타던 때라 소비시장도 커지고 있었다. 15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날아간 중동 최대 시장 두바이.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열대에는 스위스, 일본 제품으로 메워져 있었다. 현지에서 한국 시계는 알지도 못했다.며칠을 허탕치고 돌아다녀 지칠 대로 지친 김대표는 포기상태에서 KOTRA 무역관을 찾아갔다. 넋두리라도 털어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지 바이어를 소개해준다는 게 아닌가. 그는 기쁨에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멈췄던 기계를 다시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요.”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만나기로 한 바이어는 제시간에 나오지 않아 ‘허탕 치기’를 숱하게 했다. 회사로 찾아갔지만 만나주지 않아 되돌아온 날도 많았다. 조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을 치던 김대표에게는 시간 개념이 없는 중동사람을 상대로 사업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전화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한국의 직원들을 생각하면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던 1984년 어느날 중동의 사막을 헤매던 김대표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두바이의 대표적인 시계수출입업체인 AFW사에서 샘플을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한국을 방문하면서까지 6개월 동안 철저한 조사를 한 AFW사는 120개 모델 1,800개를 샘플형식으로 첫 주문을 해 왔다. 물론 ‘웨스타’ 브랜드 주문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지 모릅니다.”샘플은 두바이에서 기대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AFW사는 이듬해부터 주문량을 늘렸다. 1985년 10만개를, 1990년부터는 70만개를 수출했다. 1990년 돌파한 연간수출액 2,000만달러는 1992년까지 지속됐다. “그당시 휴일도 없이 밤샘작업을 했을 정도였어요.”하지만 1993년부터 중동시장에 이상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국내 시계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들 모두가 중동시장 공략에 혈안이 돼 있었다. 현지에서는 국내 업체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이로 인해 채산성 맞추기가 어려워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해 김대표의 부친이 고혈압으로 세상을 뜨면서 회사는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망할 것’이라는 악성루머가 중동시장에 퍼지고 있었다.김대표는 어느 정도 회사를 안정시킨 1994년 초 중동으로 날아갔다. 일일이 바이어들을 찾아다니며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더라고요.” 무려 2년 동안 현지에서 보냈다.중동시장을 정상화시키고 돌아오면서 김대표는 내수 시장을 또 하나의 승부처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안정적인 내수시장을 갖지 않고는 수출시장에서도 항상 살얼음판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회사로 돌아온 김대표는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내수 시장 공략을 위한 브랜드 개발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만에 내놓은 브랜드가 ‘포체’다. “실패를 우려한 직원들의 만류도 상당했습니다.”그렇지만 김대표에게는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1997년 말 불어 닥친 외환위기가 오히려 행운을 가져다줬다. 이때 국내 시계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매장도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김대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금난으로 쓰러져가는 백화점 내 시계매장 15곳을 인수했다.아동산업은 디자인과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매년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현재 23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올 연말까지 매장수를 40개로 확대할 계획이다. “국내 시장점유율이 15%에 이릅니다. 조만간 20%대까지 끌어올릴 작정입니다.”아동산업은 올해 수출 1,300만달러를 포함해 모두 250억원의 매출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02-754-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