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도의 핵심요충지인 서울역과 용산역에서는 요즘 대역사(大役事)가 진행 중이다. 연말 경부고속철도 서울~대전 구간 개통을 계기로 두 역사는 최초 준공 100년 만에 ‘미래형 첨단 기차역’으로 탈바꿈한다.서울역과 용산역뿐만이 아니다. 전국의 기차역이 ‘21세기형 기차역’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유통업체로 대표되는 민간자본과의 만남으로 가능해진 것이다.민자역사는 노후된 역사를 현대화하고자 하는 철도청과 거점 점포를 확보하려는 사업시행자가 함께 개발하는 사업을 말한다. 이 사업을 통해 철도청은 기차역이 가진 교통 중심성을 유지ㆍ발전시키고, 사업시행자는 집객력을 최대화하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부지를 확보할 수 있어 서로에게 이익이다. 게다가 철도이용객은 역사 내 판매ㆍ업무ㆍ서비스시설을 원스톱으로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이런 장점에 눈을 뜬 백화점, 할인점 등 유통업체들이 일제히 민자역사 공략에 나서 치열한 선점경쟁을 벌이고 있다.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입지’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 까닭이다. 철도청도 때를 놓칠세라, 사업자가 선정되지 않은 전국 기차역을 대상으로 사업주관사 모집에 나섰다.낡은 역사 ‘알고 보니 황금어장’올 2월 들어 수원역사 애경백화점, 대구역사 롯데백화점이 문을 열 예정이다. 수원역 애경백화점의 경우 지난 2월14일 개점했다가 갑작스러운 화재로 영업을 중단, 3월 초 재개점할 계획이다. 대구역 롯데백화점도 당초 2월21일로 잡았던 개점일을 대구지하철 참사로 일주일 미루기로 했다.불의의 사고로 개점에 차질을 빚긴 했지만 이들 백화점은 지역상권의 ‘핵’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애경백화점의 경우 국내 민자역사 백화점 중 최대 규모로, 역무시설 좌우에 영타운 매장과 백화점, 8개관의 복합상영관과 대형서점, 푸드코트 등이 입점한다. 올해 매출목표는 2,800억원.롯데백화점은 영등포역(91년), 안양역(2002년)에 이어 대구역에 세 번째 민자역사 백화점을 오픈한다. 동아, 대백 등 토착 백화점의 아성에 도전하는 첫 번째 대형백화점이라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이 높다. 롯데는 대규모 수입명품 매장과 60여개 대구ㆍ경북지역 브랜드를 기반으로 올해 3,6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포부다.이밖에 서울역, 왕십리역, 용산역, 의정부역, 용인 죽전역, 청량리역 등에도 백화점과 할인점 입성이 계획돼 있다.이처럼 유통업체들이 민자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사업성 높은 도심에서는 유통시설을 지을 만한 땅을 확보하기 어렵고 △유동인구가 많은 기차역은 재개발을 통해 복합공간으로 만들어 부가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서울역과 청량리역 민자역사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한화역사의 황병곤 사업기획팀장은 “유명 유통브랜드와 기차역이 만나면 집객력과 인지도가 높아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낡은 역사의 현대화를 통해 슬럼화된 기차역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고 밝혔다.실제로 민자역사에 입점한 유통시설은 대부분 높은 매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민자역사 성공모델로 꼽히는 영등포역 롯데백화점의 경우 전국 백화점 매출 순위에서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실적이 우수하다. 하루 방문 고객수만 10만명을 웃돌고 하루 평균 매출은 20억원에 달한다.지난 99년 부천역사에 입점한 이마트는 고객 1인당 매출액은 낮은 편이지만, 매출 면에서는 전국 240개 할인점 가운데 8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매일같이 할인점을 들르는 고정 출퇴근 수요가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백화점ㆍ할인점 민자역사 출점 ‘러시’유통업체들의 ‘민자역사 뚫기’ 경쟁은 지난해 의정부역사에서 올해 서울역, 용산역으로 이어지고 있다.지난해 신세계와 롯데백화점은 의정부역사 개발ㆍ운영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바 있다. 철도청도 사업자선정에 고심하다, 당초 발표시기를 한참 넘긴 후에야 신세계를 주관사로 결정했다.신세계는 의정부역사에 1단계로 할인점과 전문상가, 복합상가를 짓고 2단계로 백화점과 공원을 만들 예정이다. 특히 신세계는 경기 죽전역세권 개발 사업자로도 선정돼 민자역사 시장에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용산 민자역사는 지하층에 들어설 할인점 공간의 입점경쟁이 치열하다. 현재 이마트와 삼성홈플러스, 외국계 할인점이 막판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 현재 갤러리아백화점과 한화스토아로 운영되고 있는 서울서부역도 새 역사 완공 후 할인점으로 바뀔 계획이다. 한화역사측은 “할인점 선정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유통업계에는 롯데마트 입점이 확실시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올 4월 착공예정인 왕십리역에 이마트가 입점할 계획이며, 6월 착공예정인 청량리역에는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가 입점할 예정이다. 특히 롯데는 기존의 롯데백화점 청량리점과 신설 역사의 유통시설을 연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경부고속철과 인천국제공항철도 통합역사로 지어지는 서울역에는 갤러리아백화점이 입점한다. 이밖에 성북역, 창동역에도 유통시설이 검토되고 있어 대부분의 민자역사가 백화점 또는 할인점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사업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2010년께에는 20여개 민자역사에 유통시설이 들어서 ‘주요 기차역 = 대형유통시설’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전망이다.키워드는 ‘복합공간화’그렇다고 민자역사에 유통업체만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민자역사 개발 컨셉은 ‘복합공간화’. 대형유통시설은 민자역사에서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 : 건물 가치를 올려주고 우량 임차인을 유치하는 데 기여하는 핵심 임차인) 역할을 한다.철도 이용이 생활화돼 있는 일본의 경우처럼 역무ㆍ판매ㆍ근린생활ㆍ업무ㆍ숙박시설이 한데 어우러진 전천후 공간으로 개발한다는 게 요즘 민자역사의 공통된 지향점이다. 최근 진흥기업이 주관사로 선정된 노량진 역사는 쇼핑시설 일색인 다른 민자역사와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해 관심이 되고 있다.연면적 8만2,000평 규모로 지어지는 용산 민자역사의 경우, 올 10월 고속철도 대합실 완공을 시작으로 2003년 9월에는 전자상가, 식음시설, 할인점 등이 들어서고 2004년에는 대형패션아울렛매장이 들어선다.지하 3층, 지상 9층 규모의 초대형 역사의 또 다른 이름은 ‘아이(I) 사이버시티’.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현대역사의 김현빈 상무는 “10~30대 젊은층을 겨냥, 그들이 오감을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9개 공간으로 나눠 설계했다”고 밝혔다. 특히 건축설계와 별도로 환경설계 개념을 도입, 공간연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1906년 목조 2층, 887평 규모로 지어진 후 100년 만에 100배 규모가 커진 첨단공간이 탄생하는 셈이다.신세계가 추진하고 있는 죽전역사도 죽전역을 중심으로 8만6,000평 연면적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개발된다. 다른 민자역사와 달리 한국토지공사와 손잡은 민간공공합작 방식이며 역세권 개발에 초점이 맞춰진다. 신세계는 이곳에 백화점, 할인점, 영화관, 엔터테인먼트 시설, 환승주차장 등을 만들 계획이다.한편 철도청은 최근 민자역사 사업자 모집공고를 내고 유통업체 등의 신청을 기다리고 있다. 철도청 사업개발본부 관계자는 “2월24일 신청마감이 돼 봐야 알겠지만, 유통업계의 관심이 높아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 가운데 신규 민자역사 후보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철도청은 개발신청서를 전문가 용역을 통해 검토, 내부 심의위원회를 거쳐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다.INTERVIEW / 최병용 신세계 개발1팀 부장“민자역사, 할인점 중심으로 재편될 것”“지금까지 성공한 민자역사는 백화점이 ‘앵커 테넌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IMF 이후 백화점 매출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할인점에 비해 차지하는 면적도 커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요. 앞으로 민자역사 성패는 할인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지난 90년부터 유통시설 부지 선정 업무에 매달려온 최병용 신세계 개발1팀 부장은 “백화점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입지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대신 부도심과 지방도시, 민자역사의 상권을 살리는 ‘열쇠’로 할인점을 첫손으로 꼽았다. 이미 상당수 백화점 계획지가 할인점으로 방향을 돌리는 등 ‘전세’가 역전됐다는 것.“동인천역이나 현재의 서울역은 백화점 입지가 아닙니다. 천안역과 평택역도 백화점사업을 준비하다 포기했지요. 예전에는 유통의 대명사가 백화점이었지만 이제는 할인점이 고객 유인력에서 앞서 갑니다.”최부장은 이마트 런칭 훨씬 이전부터 전국의 상권을 조사, 이마트가 동시 출점 전략으로 할인점 시장을 장악하는 데 원동력 역할을 했다. 최근 들어서는 미래가치가 있는 민자역사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역무기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사업이득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동대구역이나 대전역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향후 기대효과까지 감안해 얼마나 높은 사업이득을 낼 것인가 검토한 끝에 수주한 것이 의정부역과 죽전역 사업입니다. 앞으로는 대형 역세권 개발도 민자역사처럼 관심의 초점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