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총재, 금융시스템 개혁마인드로 무장한 인물 평가...탈디플레 금융정책 펼칠 듯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볼 때 인플레 타깃(목표)은 중요한 도구의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를 정책수단으로 활용하려면) 보다 이해득실을 따져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진눈깨비가 도쿄 하늘을 잔뜩 가린 지난 2월24일 저녁. 치요다구 오테마치의 일본 게이단렌회관에 긴급히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신임 일본총재로 내정된 후쿠이 도시히코 후지쓰종합연구소 이사장(67)은 묘한 뉘앙스를 남기며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피해갔다.일본정부가 3월19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하야미 마사루 현 총재의 후임자로 후쿠이 이사장의 이름을 정식 발표한 이날 오후, 모든 매체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됐다.신문, 방송은 후쿠이 이사장의 신임총재 내정 사실을 긴급뉴스로 보도하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일본은행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일부 신문들은 부하직원의 오직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후쿠이 이사장이 지난 98년 일본은행 부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던 점을 주목, ‘황태자가 돌아왔다’는 제목까지 달았다.일본정부의 2월24일 발표는 임기가 끝나는 현 중앙은행 총재의 후임자가 될 새 인물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정상적인 정부 인사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이날 발표에는 더구나 함께 임기가 만료되는 두 명의 일본은행 부총재를 대신 할 새 인물들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지난 1월 퇴임한 무토 도시로 전 재무성 사무차관(59)과 이와다 가즈마사 내각부 정책총괄관(56)이 후쿠이 신임총재와 함께 호흡을 맞출 주인공들이었다.그러나 일본언론은 이날의 일본은행 총재단 인사를 단순한 인물교체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일본정부와 재계, 그리고 금융계가 안고 있는 수많은 난제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는 일본은행의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오히려 촉각을 곤두세웠다.통화, 금융 정책에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재와 두 명의 부총재가 한꺼번에 바뀌게 됨에 따라 중앙은행의 진로가 어느 곳으로 잡힐지 관심이 고조돼 있기 때문이었다.이코노미스트들과 일본언론은 핵심인물을 모두 물갈이하게 된 일본은행의 향후 정책 변화 가능성과 관련, 세 가지를 특히 주목했다.첫째, 일본정부와 여당 일각에서 목이 타도록 외쳐댔던 인플레 유도 정책이 과연 신임총재하의 일본은행에서 현실화될 것이냐의 여부다. 둘째, 일본은행의 채권시장 개입폭이 어느 선까지 확대될 것이냐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하야미 현 총재가 남기고 가는 기타 숙제를 신임총재가 얼마나 마무리할 것인가도 주목대상이라고 이들은 지적했다.물가상승 목표를 구체적 수치로 설정해 놓고 여기에 통화, 금융 정책을 맞추는 인플레 유도정책의 경우 이코노미스트들은 단기충격요법이 동원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후쿠이 신임총재가 일본은행에서 정통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성장해 시장의 생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데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초래할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에서다.그는 금융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한다는 개혁 마인드로 무장한 인물이면서도 정작 인플레 유도에 대해서는 한 발짝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해 왔다. 지난 1월 <아사히신문 designtimesp=23614>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금융완화만으로 경제구조개혁의 허점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라며 국민들 모두가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일본경제의 환부는 뜯어고쳐지지 않는다고 지적했을 정도다.후쿠이 신임총재 한 명만 놓고 본다면 디플레이션 퇴치를 위한 인플레 유도 정책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 셈이다.그러나 일본언론은 두 명의 부총재 프로필을 주목하고 있으며, 특히 도쿄대 교수를 겸임하면서 내각부 정책총괄관을 맡고 있는 이와다 가즈마사 신임부총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이와다 신임부총재는 일본정부 내에서도 대표적인 인플레 유도 지지자로 소문나 있었다. 경제기획청 관료출신인 그는 자신이 주도해 집필한 <2001년 경제백서>에서도 물가목표 제시를 통한 인플레 유도 정책을 노골적으로 주장해 왔다.그의 발탁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암묵적 지원이 결정적 힘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그는 정부, 여당 내의 인플레 대망론자들을 대변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언론은 무토 전 사무차관의 경우 차기 일본은행 총재를 겨냥해 일찌감치 재무성이 심어놓은 ‘또 하나의 황태자’라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은행을 휘어잡지 못해 애를 먹었던 일본정부가 대화창구 겸 연결고리로 사무차관을 역임한 거물을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인사발표 후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총재, 부총재 발탁)만큼 디플레이션 극복에 강한 의지를 보인 적이 언제 또 있었느냐”고 반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재는 몰라도 인플레 유도를 앞장서 주장하는 인물과 정부의 뜻을 잘 헤아려 줄 퇴직 고위관료를 한꺼번에 부총재에 앉혀 놓은 이상 디플레이션과의 싸움은 잘 풀릴 게 틀림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결국 신임총재와 두 명의 부총재의 컬러를 종합해 보면 일본은행은 인플레 유도 정책과 같은 충격요법을 당장 동원할 가능성은 낮아도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 퇴치에 보다 강력한 치료제를 투여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고집불통 노인’에 ‘바보 천치’라는 욕설까지 들으면서도 자신의 고집대로 일본은행을 끌고 갔던 하야미 현 총재와는 달리 탈(脫)디플레이션을 목표로 한 금융정책에 본격적인 드라이브가 걸릴 것이라는 추측이다.이코노미스트들은 신임총재와 부총재들이 모두 과감한 금융완화를 지지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채권시장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특히 무토 전 사무차관의 경우 중앙은행의 국채매입 확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온 점을 주목, 일본정부가 재정 출동에 나설 경우 일본은행이 국채 매입을 대폭 늘릴 가능성이 높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경기 처방으로 일본정부가 채권을 소나기 식으로 시장에 퍼붓는다 해도 일본은행이 이를 적극 사들임으로써 시장에 주는 충격을 최소화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일본은행의 장기국채 보유액은 지난 1월 말 기준, 57조2,000억엔으로 상한기준이 되는 화폐발행액 69조4,000억엔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다.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 재정정책을 간접 지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은행이 국채 매입한도를 철폐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채권딜러들은 시장에 공급되는 채권물량은 크게 늘어나도 장기국채 수익률은 3월 말께 지금까지의 사상 최저수준인 0.75%를 경신, 더 밑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이코노미스트들은 엔저를 통한 수출경쟁력 제고와 경기부양을 위해 일본은행이 외국채권 매입에 자금을 쏟아부을 경우 국제금융시장에도 상당한 파급효과가 닥칠 것으로 점치고 있다.전문가들은 하야미 현 총재의 일본은행이 남긴 부(負)의 유산을 후쿠이 신임총재 체제가 얼마나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도 주목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한 신일본은행법을 방패로 내세운 하야미 총재는 외부 압력을 배제한 채 독자적 색채가 짙은 정책을 밀어붙여왔다.하지만 디플레이션을 잡는다고 금융완화를 단행하고 제로(0)금리시대를 열었어도 경제는 계속 수렁으로 끌려들어갔다. 2001년 초에는 성장엔진의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 재할인율을 낮추라는 재계와 정치권의 요구가 빗발치듯 했지만 문제될 것 없다며 버틴 결과 ‘타이밍을 놓쳤다’는 비난만 뒤집어썼다.일부 일본언론은 일본은행이 독립성이라는 열쇠를 손에 쥔 대신 일본경제를 디플레의 늪에 깊숙이 처박아 넣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총재선임 과정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당초 이마이 다카시 전 신일본제철 회장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금융계 출신이 아닌 외부인사를 발탁해 깜짝 놀랄 충격요법을 들이밀고 싶어 했던 것으로 일본언론은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재계와 일본은행 내부는 금융계 사정에 정통하면서 점진적 개혁카드를 내놓을 수 있는 인물로 후쿠이 총재를 점찍고 이를 관철시켰다는 후문이다.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