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6일부터 3월1일까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 냉공조기 전시회’(끌리마티자시옹쇼 2003). 2년마다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이번 전시회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가 가장 주력했던 부문은 다름 아닌 시스템에어컨이다.LG는 전시회 참가업체 중 최대 규모인 140평 부스를 마련, ‘멀티V’ 등 첨단 시스템에어컨을 선보였고, 삼성은 95평 규모의 부스를 확보해 10개 제품군 50여종의 에어컨 모델을 전시하는 등 뜨거운 홍보전을 펼쳤다.시스템에어컨(용어설명 참조)은 세계 에어컨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신병기’다. 올해 전세계 시장규모가 110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커진데다 향후 가정용 에어컨을 대체할 첨단가전제품으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이다.이 시스템에어컨 시장을 놓고 국내 양대 가전회사인 LG와 삼성이 벌이는 싸움은 불꽃이 튈 정도로 치열하다. 무엇보다 이번 싸움이 흥미를 끄는 것은 싸움의 양상이 이전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3년 연속 세계 에어컨 시장을 제패한 LG에 세계 초일류기업임을 자부하는 삼성이 도전장을 낸 형상이다. 그것도 지난 99년 시스템에어컨이 본격 시판된 이후 좀처럼 따라잡지 못한 채 힘든 추격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구겨질 만한 일이다.LG 학교시장 개척에 삼성 ‘화들짝’LG와 삼성은 지난 97년 비슷한 시기에 시스템에어컨 개발에 뛰어들었다. 대표제품으로는 LG가 99년 ‘천장형 인버터 냉난방기’를, 삼성이 2000년 ‘삼성DVM’을 내놓았다.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시스템에어컨 시장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IMF 여파로 전체 에어컨 시장이 예년보다 절반으로 줄 정도로 얼어붙은데다 시스템에어컨에 대한 인지도도 워낙 낮았기 때문이다.이 와중에 날쌔게 선수를 치고 나온 곳이 LG였다. LG는 시스템에어컨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가운데 기존 시장을 뚫기보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을 ‘지름길’로 판단, 영업ㆍ마케팅ㆍ개발팀 등이 모여 태스크포스를 결성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그들이 얻은 결론은 바로 ‘학교’였다. LG 영업사원들은 ‘학생들에게 사시사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냉공조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단번에 60여개 학교에 납품하는 등 시장을 선점해 나갔다.그러다 교육인적자원부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1,000억원을 투자해 전국 13만 학급에 시스템에어컨을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LG와 삼성의 대결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2001년 봄에 실시하기로 한 조달청 입찰이 잇따른 이의제기와 투서 등으로 8월로 미뤄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애초의 단독입찰이 아닌 복수입찰을 통해 LG, 삼성, 캐리어 등이 시장을 골고루 나눠가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업계에 따르면 첫 입찰 이후 지난 2월 말까지 LG가 약 4만대, 삼성이 1만7,000대 등을 학교 시장에서 판매했다. 결국 1라운드에서 붙은 싸움은 LG가 판정승을 거둔 셈이다.학교에서 한차례 격전을 치른 두 회사는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주상복합아파트 등 고급아파트 시장으로 싸움터를 옮겨 2라운드에 돌입했다. 업계는 국내 아파트 시장 규모가 연간 5만~6만대로 해마다 작게는 50%, 크게는 100% 이상 고속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학교 시장에서 LG에 무릎을 꿇은 삼성은 아파트 시장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노렸다. 계열회사인 삼성물산의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약 2만대를 설치한 것을 비롯해 쌍용건설이 서울 경북궁 인근에 짓고 있는 ‘경북궁의 아침’ 등에 자사 시스템에어컨을 설치했다. LG도 서울 강남의 ‘I-타워’, 경기도 분당의 백궁단지 등 고급아파트 입찰전에서 승리하며 학교 시장의 기세를 이어나갔다.아파트 시장에서는 현재 비등비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LG 관계자는 “삼성이 계열회사인 삼성물산에서 수주한 분량을 빼면 LG가 압도적으로 앞선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도 “학교 시장에서는 밀리고 있지만 건설 시장에서만은 먼저 진입한 삼성이 우세하다”고 반격했다.유럽에서 한판 격돌 분수령국내 시장에서 양보 없는 싸움을 전개 중인 두 회사는 해외시장으로 무대를 옮겨 3라운드를 진행 중이다. 세계시장에서는 LG가 앞선 상황이다.일반 에어컨 시장에서 2000년부터 3년 연속 1위(판매대수 기준)를 차지하며 에어컨 강자로 대접받고 있는 LG는 지난 2월 유럽 최대의 에어컨 시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에 500평 규모의 전문인력육성센터인 ‘LG에어컨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유럽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이밖에 중국 톈진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잇달아 동일한 규모의 교육센터를 여는 등 세계 에어컨 강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LG는 이미 지난 98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궁에 2,000대, 아랍에미리트 토지개발공사에 2만대를 설치하는 등 앞서나갔다. 2001년에도 영국 카지노협회, 연금공단 등에 5만대를 수주받아 유럽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LG 관계자는 “건물설계와 함께 대규모 물량의 수주가 결정되는 시스템에어컨사업에 있어 기술영업인력의 경쟁력은 곧 사업의 성패와 연결된다”며 “국내에서 에어컨사관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살려 설치, 서비스 및 기술력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LG는 2005년 35억달러, 2010년 70억달러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중 시스템에어컨의 비중을 2010년까지 50%(35억달러) 수준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삼성은 유럽과 중국을 주 타킷으로 미국과 중동지역까지 삼성 브랜드인 ‘멀티-DVM’의 이름으로 파고들겠다는 각오다. 삼성은 올 5월에 입주하는 중국 상하이 최고급빌라 ‘하이트 칼라’ 등 세계시장에 진출했으며, 올 초 카타르 왕궁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향후 중동과 유럽시장을 공략해 2010년까지 시스템에어컨 1위로 올라서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발표했다.삼성은 올 초 인사에서 시스템가전사업부장과 전략마케팅팀장을 교체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 LG로부터 당한 수모를 갚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시스템에어컨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학교와 아파트, 그리고 해외시장으로 옮겨 다니며 사활을 건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회사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판가름날지 자못 궁금하다.용어설명시스템에어컨LG와 삼성이 자존심을 건 승부를 벌이는 것은 시스템에어컨이 갖고 있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 시스템에어컨은 일반 가정용(패키지 에어컨)이 아닌 대형업소 및 빌딩용 냉난방 공조설비를 위한 상업용 제품. 실외기를 한 대만 설치하고도 실내기를 건물의 구조와 평형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가령 100개의 사무실을 갖고 있는 오피스빌딩의 경우 원하는 사무실에만 에어컨을 가동할 수 있다. 상업용 빌딩뿐만 아니라 여러 대를 설치하기 어렵거나 공조가 필요한 학교, 아파트, 관공서 등에도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