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캔커피 히트친 후 2000년 녹차음료, 2002년 아미노산 음료로 연타석 홈런 대행진

청량음료회사들에 일본은 천국이자 지옥이다. 도심 상점가와 오피스빌딩은 물론이고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도 어김없이 깔려 있는 자동판매기들은 24시간, 연중무휴로 소비자 곁을 파고들며 세일즈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녹차, 우롱차 등 각종 차음료를 물마시듯 마셔대는 일본국민들의 생활습관은 지갑이 아무리 얇아졌다 해도 음료진열대를 수시로 기웃거리게 만들고 있다. 불황이라 해도 음료 시장은 상대적으로 추위를 덜 탈 수밖에 없는 여건이 애초부터 갖춰진 셈이다.그러나 수요기반이 탄탄하다고 시장이 호락호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살인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음료회사들간의 생존경쟁이 숨막히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각양각색의 신제품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재료, 제법은 물론이고 브랜드 네임에서까지 기발한 컨셉과 튀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제품들은 진열대를 화려하게 수놓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소비자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은 음료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리는 것이야말로 얼어붙은 땅을 맨손으로 녹이는 것과 다름없다며 험난한 생존싸움에 두 손을 바짝 들고 있다.기린맥주의 자회사인 기린음료는 이 같은 악조건에서 대형 히트상품을 연타석으로 날려 부쩍 주목을 받고 있는 회사다. 아사히맥주에 정상의 자리를 빼앗긴 모회사 기린맥주가 옛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고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시장에 비쳐진 기린음료의 이미지는 영 딴판이다.내놓는 제품마다 최근 수년간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면서 히트제조기의 명성을 얻고 있다. 지난 99년 캔커피로 대형 홈런을 날린 후 2000년과 2001년 여름에는 녹차음료로, 2002년에는 아미노산 보충음료 ‘아미노 사프리’로 연타석 홈런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시판 첫해에 1,000만상자(24병들이)만 팔아도 대성공이라는 일본 음료 시장에서 아미노 사프리는 9개월 만에 1,470만상자가 팔려나갔으며 이로써 기린음료는 4년 연속 신제품 1,000만상자 돌파로 업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대박상품을 끊임없이 쏟아내면서 매출은 99년의 2,610억엔에서 2002년 3,200억엔(추정)까지 껑충 뛸 것이 확실해졌다. 거의 모든 시장이 마이너스를 향해 달리고, 축소 일변도로 흐르는 일본의 경제 상황에 비춰 본다면 눈부신 성적이 아닐 수 없다.일본언론과 전문가들은 기린음료가 감추고 있는 승리의 유전자를 무섭도록 철저한 라이벌 연구와 생활 주변에서도 히트의 단서를 캐치해내는 사고의 유연성에 찾고 있다. 이와 함께 상품 컨셉은 소비자에게 2초 내에 전달되지 않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기민하고도 스피디한 광고전략도 연속 히트를 뒷받침한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고 보고 있다.기린음료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라이벌 연구는 아미노 사프리의 개발과정에 얽힌 뒷이야기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미노 사프리의 개발 주역은 31세의 팀장을 비롯한 3명의 젊은 여성사원들이었다.이들은 2001년 가을 어느날, 상품전략 회의를 하던 중 “아미노산을 섭취하면 골프를 치고 난 후에도 왠지 모르게 피로가 덜하고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남자 상사로부터 들었다.3명의 여성사원은 약속이나 한 듯 ‘아미노산’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 당시 TV에서는 체내지방을 연소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며 아미노산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을 잔뜩 높여준 상태였다. 시장에는 식품업체인 아지노모토의 ‘아미노바이탈’과 메이지유업의 ‘바암’이라는 제품이 나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이들은 타업체가 먼저 내놓은 제품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리고는 한발 앞서 제품을 만든 회사들이 지방연소, 피로회복 등 스포츠 활동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하고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미노산을 컨셉으로 한 신제품을 만들되 타깃을 스포츠에만 한정하지 않고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마시는 음료로 정한다는 것이었다.시장에는 스포츠음료와 기능, 맛이 유사하면서도 일상적으로 마시는 제품이라는 컨셉을 내세워 재미를 보고 있는 제품이 없지 않았다. 산토리의 ‘다카라’가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여성사원들은 ‘다카라’와도 역시 차별화를 시도하기로 했다.아무 때나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기능성 음료라는 점에서는 다카라와 성격이 겹치지만 ‘아미노산’이라는 재료를 강조한다면 또 다른 영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경쟁업체나 같은 길을 앞서간 타업체들이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분야를 치밀하게 연구해 틈을 발견해내는 기린의 저력은 아미노 사프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녹차음료 신제품을 2000년 여름 시장에 투입할 때 기린은 이 분야의 최대업체인 이토엔이 건강만을 강조할 뿐 ‘맛’을 알리는 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했다. 기린은 재료로 들어가는 옥로(녹차의 품종 중 하나)가 가장 훌륭한 맛을 낼 때의 물의 온도가 섭씨 60도인 점을 중시, 차맛이 최고 좋은 상태로 우러나게 하는 장치를 독자개발해 승부수를 띄웠다.그렇다고 기린이 타업체들의 장점만 보고 벤치마킹한 것은 아니었다. 기린은 타업체들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잠재시장을 찾아내거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성장의 거름으로 역이용하는데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이 같은 기린의 장점은 아미노 사프리 개발팀이 맛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개발과정에서 주역들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아미노산 음료가 그레이프 프루트 등 과일주스맛을 갖고 있는 점을 눈여겨보았다.그러나 시제품의 여러 가지 맛을 놓고 주위의 의견을 구한 결과 ‘주스’ 쪽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스맛의 아미노산 음료를 마실 바에는 주스를 마시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며 등을 돌릴 소비자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개발팀은 수백회에 걸친 조사와 실험을 통해 현재 시판 중인 맛을 확정했다.기린은 아미노 사프리의 시판 직후부터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타입도 함께 발매했다. 스포츠 등의 기능성 음료는 여름이 최전성기이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판매량이 뚝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포석이었다.기능성 음료를 자처하면서 따뜻하게 마시는 것을 내놓은 것은 기린이 업계 최초였다. 회의 도중에 흘러나온 단어 한 마디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제품 단서를 캐낸 센스, 그리고 타업체들의 장ㆍ단점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이를 자신의 무기로 만드는 눈이 대박의 씨앗이 됐음을 아미노 사프리의 예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스피드로 무장한 광고 분야의 저력은 광고카피를 뽑아낼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기린은 스모(일본씨름)선수 중 발군의 성적을 올리며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던 도치 아즈마를 모델로 기용했다. 아미노 사프리를 마시면 스타 스모선수처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갖게 되고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그리고 상반신을 드러낸 도치 아즈마에게 한 손으로 아미노 사프리를 들게 한 후 ‘천재 아미노산’이라는 단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도록 했다.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스타 스모선수의 ‘천재’적 이미지가 제품에서도 느껴지도록 한 것임은 물론이다.이 광고카피는 아미노산이 들어간 음료 앞에 천재라는 단어를 갖다 붙임으로써 소비자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눈깜짝할 사이나 다름없는 2초 안에 제품의 특징과 기능을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전달한 고감도 광고전략의 본보기를 훌륭하게 보여준 셈이다.기린음료는 2012년 매출목표를 1조엔, 영업이익은 500억엔으로 책정, 외형과 실속을 현재의 약 3배로 키우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대박행진을 발판으로 기린음료가 과연 일본 음료업계의 기둥으로 우뚝 설 것인지 관심거리다.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