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탁고 급감 계속...놔두면 죽고, 살리자니 뾰족한 수 없어 골머리

금융상품에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라이프사이클’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은행신탁은 지금 많이 아픈 상태다. 병세가 어찌나 심각한지 부모(시중은행)들이 환자를 포기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정도다.2002년 말 국내 14개 일반은행의 금전신탁 수탁규모는 58조331억원으로 2001년 말의 65조9,292억원에 비해 7조8,961억원이 줄었다. 신탁이 최고 호황을 누렸던 97년의 171조1,615억원에 비하면 3분의 1로 쪼그라든 것이다.은행 신탁에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 98년 4분기부터 은행신탁의 수탁고는 매년 감소를 거듭했고(2001년 제외), 대우사태와 채권시가평가제 도입 이후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래프)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은행에서 신탁부장이란 자리는 임원으로 가는 ‘직행버스 티켓’이었다. 하지만 넉 달 전 신탁부서 책임자로 발령받은 ㄱ은행 모 부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행원생활 15년, 그간 은행 본점에서 주요 부서를 두루 거쳤고 행내에서 ‘잘나간다’고 자타가 공인해 왔다.‘이제 나더러 그만 나가라는 뜻인가?’ 별별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또 다른 은행의 신탁담당 부장은 “사양사업이라고 불리는 분야에서 일하는 심정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재경부 은행제도과 중에서 사람이 가장 자주 바뀌는 자리가 신탁담당이다”고 덧붙이기도 했다.이처럼 신탁이 침체기를 맞으면서 최근 ‘신탁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거론되고 있다. 단순히 규모가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지속적으로 수탁고가 감소하는 ‘증상’ 이면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첫째, 고객의 신뢰를 잃은 것이다. 대우채 사태 이후 신탁을 거래하던 고객들은 ‘은행에서도 원금손실이 나더라’는 충격을 받고 등을 돌렸다.둘째, 수익증권 뮤추얼펀드 등 강력한 경쟁상품의 성장이다. 이런 투신상품과 금전신탁은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그 성격이 똑같다. 더구나 이 경쟁자들은 최근 은행 안으로 들어왔다. 요즘 은행들은 투신운용사의 수익증권을 팔고, 그 수수료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시중은행 PB들은 한결같이 “고객에게 신탁보다 수익증권을 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마지막으로 수익성이 떨어지고 있다. 신탁계정 수탁고가 감소를 거듭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역을 살펴보면 오히려 늘어나는 상품도 있다. 특히 최근 단기형 특정금전신탁의 규모가 늘고 있는 추세다.하지만 단기 특정금전신탁은 은행측에서 별로 반길 만한 상품이 못된다. 한미은행의 경우 전체 신탁계정 수탁고 6조원 중에서 약 3조5,000억원이 특정금전신탁이다. 특정금전신탁의 평균수수료는 0.2~0.3% 선. 한마디로 ‘별로 실속 없는 건 늘고, 돈 되는 건 점점 빠지고 있는’ 형편이다.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이르기까지, 한미은행이 신탁개편을 위해 고군분투한 사례는 은행들이 처해 있는 입장과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미은행은 계열 투신운용사가 없는 은행이고, 신탁은 지난해 기준으로 이 은행 수익의 20%를 차지했다.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한미은행 신탁부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검토해 봤다”고 한다. 처음에 수익증권의 도전을 받고 수탁고가 줄고 수익성도 떨어지는 등 위기에 몰리자 한국펀드평가에 컨설팅을 의뢰, 진단을 받았다.“전문자산운용사와 경쟁하려면 이에 상응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고, 특히 대폭적인 인력보강이 필요하다”는 용역결과가 나왔다. 최소 5~10명을 충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컨설팅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비용 대비 효과, 은행문화, 행원출신과 외부인력간 처우문제 등이 겹쳐 진퇴양난이었다.방향을 선회해서 계열운용사를 갖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설립하는 방안이 유력했다. 하지만 운용사 경영 노하우 부족이나 투자비용 등을 고려할 때 무리수라고 판단됐다.다음에는 명망 있는 외국계 운용사와의 합작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슈로더, 템플턴 등 세계적 운용사들은 이미 국내 시장에 많이 진출해 있는 상태라 파트너 찾기도 쉽지 않았다. 혹 파트너가 될 만한 곳이 있다 해도 이들은 경영권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다시 난관에 봉착. ‘차라리 투신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현재 있는 회사를 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기까지 검토해 본 후, 한미은행 신탁증권팀은 이제까지 검토해 온 계열운용사 설립 프로젝트를 잠정 중단했다. 그대신 컨설팅 결과를 일부 수용, 운용시스템을 확충하는 등 ‘점진적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있다.한편 수탁고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엄청난 규모(41조5,000억원)인 ‘공룡’ 국민은행의 신탁사업부는 경영진의 관심이 수익증권 판매에 집중돼 있는 터라 상당히 위축돼 있는 모습이다.국민은행 신탁부 역시 지난해 외부 컨설팅을 받아 운용시스템 등을 손질했다. 한편으로는 최근 부서인원이 축소됐고 신탁기획ㆍ상품ㆍ부동산신탁ㆍ운용ㆍ관리ㆍ투자전략 등이 모두 하나의 부서로 통합됐다.계열운용사인 국은투신과의 관계도 미묘한 사안이다. “최근 증시에 투입한 자금 약 1조원, 그런 게 신탁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한 관계자는 섭섭한 마음을 이렇게 표했다. 이 자금의 대부분(8,000억원)은 계열운용사인 국은투신의 수익증권으로 증시에 들어갔다.이와 관련해 한 신탁 관계자는 “신탁에 관한 한 시중은행들은 ‘독자생존가능파’ ‘사실상 포기파’, 그리고 ‘관망파’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칠게 나눠서 국민 우리 하나 등은 독자생존으로, 신한은 신탁전략 전면 수정으로, 한미 외환 등은 ‘관망’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신탁자산 규모가 큰 은행들은 억지로라도 독자생존으로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주회사가 된 신한은행은 사실상 신상품을 만들지 않고 실적배당형 운용상품은 금융그룹 내 운용사에 맡기는 전략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대부분의 은행은 섣불리 결론 내리기를 꺼려 관망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예측이다.그러나 이 같은 해석에 대해 각 은행 신탁부장들은 한결같이 “이에 대해 어떤 멘트도 하지 않겠다”며 확인을 거부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지만 은행이 신탁업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고, 포기해서도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신탁실무자들은 재산신탁 등 은행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한편 다른 해석도 있다. 통합자산운용업법 제정 과정에서 소외로 불만을 가진 은행들이 상황을 과장해서 일부러 ‘엄살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신탁이 다시 생기를 찾기 위해서는 모종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와 관련, 하나은행은 의미 있는 시도를 발빠르게 시작했다. 종합자산관리라는 기치를 내걸고 ‘리얼티클럽’이라는 부동산 처분, 관리신탁을 최초로 선보인 것.고객으로부터 부동산 형태의 자산을 위탁받아 관리, 처분 등을 해주고 약정수수료를 받는 상품으로, 거액고객 자산관리(프라이빗 뱅킹)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영업한다는 게 이 은행의 전략이다.관리신탁은 월 임대료 1,000만원 이상이 나오는 부동산, 처분 및 취득신탁은 10억원 이상의 부동산 등이 대상이다. 일단 VIP고객 위주로 판매하고 차차 일반인과 해외동포 등을 공략할 계획이다.금전신탁보다는 글자 그대로 ‘믿고 맡기는’ 신탁 본래의 의미에 근접해 있는 상품이다. 하나은행 신탁팀 관계자는 “당장 엄청나게 팔려 나간다든가, 높은 수익을 내기는 어렵지만 프라이빗 뱅킹(PB)과 연계, 앞으로 신탁의 생존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품”이라고 말했다.신탁상품의 '어제와 오늘'90년대 화려한 시절은 가고 쇠퇴기 맞아‘난산이었지만 어쨌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쑥쑥 자랐다. 지금은 몰라보게 쇠약해졌지만 결코 태어날 때부터 찬밥은 아니었다.’국내 은행신탁상품의 현재까지의 인생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은행신탁은 경제개발과 함께 성장해 왔다. 항상 부족하기만 했던 산업자본을 공급하는 중요한 창구 중 하나가 신탁이었다.금융자율화가 확대될 무렵에는 은행의 수익에 큰 도움이 되는 효자 노릇을 했다. 신탁의 처음 시작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현대적인 신탁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유아기(1961년~)제1차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1961년 신탁법 및 신탁업법이 만들어졌다. 현재 우리나라의 은행신탁상품이 금전신탁에 치우치게 된 이유를 이 같은 ‘태생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자금조달 수단으로 신탁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재산관리형 신탁이 발붙이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법이 만들어진 이듬해에 한일은행이 처음으로 신탁업을 할 수 있는 인가를 먼저 받고, 3개월 후 다른 시중은행들도 잇달아 신탁업 겸영 인가를 받는다.하지만 이때는 은행은 신탁을 ‘부수업무’쯤으로 취급했고, 그러다 보니 당초 취지였던 산업자금공급과 종합재산관리 기능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국은 68년 아예 신탁 전업은행인 ‘한국신탁은행’을 설립해 개발신탁을 중심으로 중장기산업자금 투자와 융자를 활성화하려 했다. (다른 시중은행들의 신탁업 겸영 인가는 취소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한국신탁은행은 경영이 악화돼서 76년 서울은행과 합병, ‘서울신탁은행’이 된다. 한동안 유일한 신탁겸영은행이었다. 95년 서울신탁은행은 다시 서울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 또 한 번 하나은행과 합병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다.청소년기(1983년~)1980년대 금융계의 화두는 ‘자율화.’ 이 같은 추세에 맞춰 83년부터 ‘은행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표 아래 다시 일반은행들도 신탁을 겸영할 수 있게 된다. 83년 지방은행, 84년 시중은행, 85년 외환은행과 외국은행 국내지점 등 하나씩 하나씩 신탁업 겸영인가를 취득하고 89년에는 국책은행까지 확대된다.이처럼 신탁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기까지의 과정에 은행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지금도 “은행들이 어떻게 신탁업을 따냈는데, 함부로 포기 운운할 수 있는가”라는 의견이 많다. 어쨌든 이때부터 적립식 목적신탁, (명목상) 실적배당형 가계금전신탁, 노후생활연금신탁, 기업연금신탁 등 여러 종류의 상품들이 나타났다.청년기(1993년~)은행신탁의 화려한 시절이다. 은행간 치열한 판매경쟁이 불붙었고 세제혜택이 있는 상품 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탁고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금리자유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금리경쟁도 치열했다.금전신탁 수탁고는 97년 186조1,400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때 은행신탁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들이 생겼다는 지적도 많다. ‘무늬만 신탁’이지 신탁은 암묵적으로는 예금과 다름없는 안전성과 고수익을 동시에 보장하는 상품이었다.금전신탁 중 일부는 아예 원본보전 및 확정배당상품이었고, 실적배당상품의 경우에도 은행이 일정한 수익률을 보장했으며, 고객들 역시 이를 완전히 믿었다. 연 30%가 넘는, 현시점에서 보면 ‘꿈같은’ 금리를 받아갈 수 있었다. 한편 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단기상품들이 신탁계정으로 대폭 이동해 신탁 본래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노년기 (?)IMF 외환위기 이후 신탁제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성장시대의 산물이던 개발신탁은 99년 신규수탁이 중지됐다. 은행신탁은 98년부터 수탁고가 줄기 시작했고, 반면 이때 은행 정기예금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투신사의 수탁고는 외환위기 이후 한동안 증가했다가 99년 대우사태를 기점으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우사태에 따른 원금손실과 고객의 불신, 뮤추얼펀드와 수익증권 돌풍, 저금리 등은 은행신탁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도움말ㆍ손상호 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INTERVIEW / 홍완선 하나알리안츠투신운용 상무국내 은행신탁의 ‘산증인’“‘아니 이 상품 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 나와 있습니까. 있으면 보여주세요’ 하면서 젊은 과장이었던 제가 원칙대로 규정대로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죠. 서슬 퍼런 재경부의 권위가 얼마나 무서운 줄 몰랐던 때였으니까요. 당시 방영민 사무관이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을 못하더군요.”하나알리안츠투신운용 홍완선 상무는 은행신탁이 전성기를 누리던 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하나은행에서 신탁업무를 맡았다. 그는 업계에서 국내 은행신탁 역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져 있다.처음 신탁과 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투자금융이 하나은행으로 전환하면서다. 한국투자금융 증권부에서 채권ㆍ주식 매매와 인수 업무를 맡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으로 전환된 후 신탁부서에 배치를 받았다.“후발은행의 일개 과장이 그저 일하는 재미에 신났죠. 매일 밤 늦은 줄도 모르고 신탁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때는 시장이 초기라서 워낙 재미있는 일도 많았어요. 어쨌든 당시 재경부 담당자들이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서 서로 고충을 털어놓으며 일했습니다.”91년께부터 국내에서 은행신탁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하나 보람 등 후발은행이 전략적으로 신탁상품에 무게중심을 두고 공격적인 영업을 펼친 덕이 컸다. 한때는 신탁자산이 하나은행 전체 자산의 80% 수준에 육박할 정도였다. 시장이 쑥쑥 커가는 재미에 일할 맛 나는 시기였다는 얘기다.그런데 90년대 초에는 어떻게 실적배당상품인 신탁을 거의 확정금리처럼 원금도 보장하고, 미리 예상금리를 제시하면서 고객에게 판매하고, 또 실제로 당초 약속대로 어김없이 높은 금리를 줄 수 있었던 것일까.홍상무는 “주식과 시가평가 채권에 운용하는 요즘 같은 형태의 펀드만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라면서 “당시는 신탁자산 대부분을 여신으로 운용했고, 그때 대출은 무위험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금리를 맞추기가 쉬웠다”고 설명했다.홍상무는 이후 아예 투신운용사로 자리를 옮겨 ‘전공’을 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하나은행 신탁부서에서 같이 일했던 이들이 지금 증권가에 폭넓게 진출해 있다.미래에셋자산운용 김태우 주식운용팀장, 부국증권 김은섭 이사, 김윤모 하나증권 본부장 등이 모두 옛 하나은행 신탁부 출신들이다. 홍상무는 “증권가의 전문운용인력을 신탁부서로 스카우트해 오는 게 일반적인 일”이라며 “거꾸로 신탁에서 증권가로 인재를 배출했다”고 뿌듯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