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업무능력은 기본…부단한 자기계발, 원만한 대인관계, 네트워크 활용 등이 주효
지난 1월16일 오전 7시 서울은행연합회 뱅커스클럽에서는 ‘첩보작전’을 하듯 문단속을 해가며 열린 모임이 있었다. 바로 ‘여성금융인 네트워크’ 창립총회다. 모임이 제 모습을 갖출 때까지 외부노출을 자제하자는 회원들의 의견에 따라 극비리에 진행된 것.이날 회장으로 선출된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은 모임의 취지에 대해 “방카슈랑스 등을 앞두고 금융업종간 정보 및 지식공유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여성금융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 및 지식교류를 활성화해 나가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이런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이 모임공개를 꺼리는 것은 “‘잘나가는 여자’들에게 던져지는 곱지 않은 시선”이 한 요인일 거라며 김원장은 조심스럽게 해석했다.현재 은행ㆍ보험ㆍ증권 등 금융권에 지점장급 이상의 간부직 여성은 6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올해는 국내 금융권에 더 많은 여성간부들이 탄생할 전망이다. 참여정부의 여성할당제 실시에 발맞춰 일선 금융기관들이 너도나도 여성승급할당제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말부터 2월 초에 있었던 은행인사에서 이런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국민은행, 우리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인력 진출이 부진했던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정기인사에서 4급 차장 승진자 80명 중 여성이 12명을 차지했다. 이전의 인사에서 여성 승진자가 1~2명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기업은행도 여성지점장으로 2명의 차장을 승진시켜 발령을 냈다. 그리고 책임자급으로 22명(대상의 20%)의 여성을 전문인력으로 승진시켰다. 외환은행도 여성팀장 3명을 지점장으로 발령내고 본점 부서장(외환업무실장) 자리에 최초로 여성을 앉혔다. 국민은행은 3월4일 국내 은행 가운데 첫 여성감사로 이성남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를 내정했다고 밝혔다.이런 변화 속에서 금융권 여성들의 ‘유리천장(Glass Ceiling) 통과하기’는 더욱 날개를 달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금융권 여성간부의 절대 숫자는 남성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은행과 외국계 금융회사들에 편중돼 있어 국내 보험사, 증권사의 여성간부 비중은 더욱 열악한 수준이다.하지만 지금처럼 정부의 의지가 강하고 사회통념이 바뀌면, 기업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갈수록 커져 더 많은 여성간부들이 금융권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그동안 여성이 직장에서 간부로 승진하는 것을 은밀히 방해했던 ‘유리천장’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금융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임원들은 이전처럼 ‘구색 맞추기’나 ‘전시용’이 아닌 능력을 검증받은 프로 중의 프로들이다. 이미 유리천장을 통과해 정상에 오른 금융권 최고직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포인트와 조언을 들어봤다.전영희 국민은행 여의도영업부 부장“포기하지 않으면 이뤄진다”‘주택은행 대졸여성 공채 1기, 첫 기혼여사원, 첫 출산휴가 이용자, 첫 여성지점장.’26년간 은행근무를 하면서 전영희 국민은행 여의도영업부 부장(49)에게는 유난히 1호 경력이 많이 따라붙었다. 늘 앞서가는 입장이었기에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다.“입행 당시만 해도 대졸여사원은 이단자처럼 여겨졌죠. 처음 1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전부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신입사원들에게 나눠주는 업무규정집을 남자신입사원들에게만 주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기획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신입사원에게도 당연히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문제점을 말했다. 당시 은행관행으로 볼 때는 새파랗게 어린 신입이 타 부서 부장에게 전화로 항의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돌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부장은 일리 있는 지적이라며 다음날 바로 책을 보내주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크게는 여성이 대등하게 같이 가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직분위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었다. 그럴 때면 “최소한 대리는 하고 그만두자”며 목표를 세워 견뎌냈다.대리가 되고 차장으로 승진할 때 또 한 번의 시련이 있었다. 시험성적으로 평가하는 대리와 달리 차장은 인사고과가 기준이다 보니 여자로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대리가 됐던 동기들이 차장이 된 후 두 번이나 미끄러지는 아픔이 있었다.그렇지만 전부장은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충격으로 며칠 마음고생은 했지만, 다시 털고 일어나 다음 승진에 대비해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이처럼 전부장은 어려운 고비마다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정신’으로 다시 일어섰다.전부장에게는 ‘평생 사회생활을 한다’는 확고한 직업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에서 힘들거나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런 직업관과 더불어 전부장의 ‘일에 대한 열정’도 유리천장을 통과할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됐다. 주어진 일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 일하다 보니 괄목할 만한 업적들을 일궈낼 수 있었다.1992년 주택은행 연수원 교수시절 연수를 받고자 하는 사원들의 수요에 비해 은행측의 공급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느껴 다각도로 해결방안을 고민했다. 그때의 고민을 토대로 2000년 연수원장에 취임하자마자 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 연수와 인터넷 행원종합평가고시를 실시해 ‘효율적인 업무추진’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또한 2001년 영업부장을 맡으면서 VIP영업 특화전략을 내세워 1년 만에 전국 고객관리 부분에서 1위를 한 데 이어 VIP고객을 세 배로 늘리는 진가를 발휘했다.전부장은 “승급할당제와 같은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유리한 제도적인 장치가 확산되고 있다”며 “더 많은 여성간부들이 나오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손병옥 푸르덴셜생명보험 부사장“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다”“올해는 처음 생긴 국제 인사 관련 자격증(SPHR)을 따려고 합니다.”생명보험업계 최초로 부사장에 오른 손병옥 푸르덴셜생명보험의 인사담당 부사장(51)은 자타가 인정하는 ‘공부벌레’다. 지난해는 보험업무를 알아야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쁜 가운데 시간을 쪼개 직원들과 ‘보험경영전문가’(FLMI) 자격증을 함께 따기도 했다.손부사장은 새로운 업무가 주어질 때마다 피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부닥치면서 직접 헤쳐 나가는 스타일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크라커 내셔널은행 등에서 회계업무를 맡았을 때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보충을 하기도 했다.능숙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매일 집에 가서는 CNN 방송을 보고, 차에서는 영어테이프를 듣는다. 늘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조직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필수라고 생각하는 그는 이제 배우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배여 있다.이런 열정적인 배움의 자세에 버금가게 손부사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힘이 됐던 것은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다.손부사장은 ‘지나온 다리를 불태우지 말라’는 제임스 최 스팩만 회장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 인간관계는 반복되는 것으로 좋은 관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그렇게 하려고 일상에서 항상 애쓴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경조사, 기념일 등을 챙기는 것은 물론 시간이 날 때마다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에게 일일이 개인적인 관심을 표현하기도 한다.손부사장은 이런 원만한 관계를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뤄내려고 노력한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가족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또한 여성후배들이 가정과 직장생활의 병행에 대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하차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어려움과 희생 없이 남자들과 똑같은 지위에 오를 수는 없다”며 “가족의 이해와 협조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 최선이다”고 힘줘 말한다.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외환딜러인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54)은 국내 여성금융인 대표주자다. 70년대 말 국내에는 ‘외환딜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그당시 김원장은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은행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사가 ‘외환딜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뜻하지 않은 제의를 했다.사실 김원장 본인도 비서직말고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해외 각지에서 1년 남짓 딜링 현장교육을 받고 80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딜링룸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척한 분야에서 14년간 한우물만 팠다.이 기간에 김원장은 늘 남보다 1시간 먼저 출근했다. 그리고 밤샘근무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당연히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했다. 영업도 잘하는데다 성실한 그녀의 모습이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평가가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됐다. 한 번은 다른 팀장의 농간으로 팀원 전원이 팀을 옮겨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그녀에게는 사회생활에서 일대위기였다. 이때 김원장은 지점장을 찾아가 회사의 수익 측면에서 어떤 결정이 합리적인가를 논리적으로 설득했고, 결국 지점장은 팀원들을 전원 원대 복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이런 김원장의 성실함과 끈질김은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이 되면서도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지금도 김원장은 일이 남아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절대 다음날로 미루지 않고 바로 처리한다.이런 부지런함이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얼마전 생명보험회사의 연간 교육 프로젝트 수주건이 있었다. 3개월 동안 본인이 직접 주말도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해, 회사규모 때문에 신뢰를 갖지 못했던 고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김원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또 하나는 폭넓은 네트워킹에 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서 근무할 때부터 사람들과 연분을 쌓다보니 보통 10년 넘게 관계를 유지했고, 현재는 그들이 모두 금융기관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대학의 최고전략과정 등에도 참여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아둔다. 올해 발족해 회장직을 맡은 ‘여성금융인 네트워크’가 자리를 잡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정숙 삼성증권 상무“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만든다”은행이나 보험에 비해 증권업계는 업력이 길지 않아서인지 개방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성임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정숙 삼성증권 상무(38) 역시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며 말문을 연다. “여성고객이 늘고 있는데 조직은 남자들이 대부분이라 시장의 다양성을 제대로 반영하기 쉽지 않다”며 “회사에서도 빨리 책임자급 여성들이 많이 나오길 기다린다”고 전한다.이상무는 5년 전 대형로펌인 광장에 있다가 삼성증권 법무실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펌에서 주로 기업 관련 일을 많이 했다. 로펌의 일이 대부분 사고가 터지고 난 후 수습을 위한 것이라면 기업체에서의 일은 사전예방 차원도 있다는 매력에 옮겨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삼성증권에서 로펌경력자를 찾아 6개월간의 협상과 준비 끝에 본인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맞춰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전의 로펌과 기업체의 조직문화가 다른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사소하게는 아침잠이 많은 습관을 일찍 출근하는 삼성증권으로 옮기면서 바꿀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이렇게 본인이 하고 싶거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이상무는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스스로 여건을 만들어 나간다.사실 이상무가 자신에게 잘 맞는 직업으로 변호사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세계위인전을 읽으면서 변호사라는 직업에 막연한 동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변호사를 목표로 해 공부를 했다.그러나 대학진학 때 집안 사정상 본인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하기가 어렵게 되자, 차선으로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대주는 대학교의 법학과를 선택했다.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목표를 포기하기보다 목표를 이뤄낼 수 있도록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 간 것이다.자신에게는 엄격한 이상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비록 업무상 관계가 없더라도 본인이 먼저 다가가 관심을 보인다. 오히려 여자와 동료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남자임원들이 어색해 하지 않게 배려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기업법무실을 꾸린 초창기에는 영업 쪽과 부딪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영업 쪽에서는 현장을 모르고 영업 뒷다리를 잡는다고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힘들지만 우선 한숨을 돌리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자신의 몫은 리스크관리이지만 상대방은 영업이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를 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담당 영업직원들을 감정의 앙금 없이 편하게 대한다.이상무는 힘들 때면 본인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떠올린다. 대학졸업을 하고 1년이 지난 뒤 사법시험 결과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인생이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은 좌절에 빠졌었다.그때의 절박감과 중압감 등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특히 소수자에게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스스로를 계발하고, 준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격증을 따거나 어학실력을 늘려 기회가 왔을 때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