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는 숫자의 세계다. 허수와 실수가 빚어내는 조화의 세계이기도 하다. 숫자는 다른 언어보다 높은 설득력을 갖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언제나 허위를 증언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연설꾼들이 그럴듯하게 말하는 방법으로 언제나 별 것도 아닌 숫자를 주워 삼킨다는 것도 이제는 상식이다.그러나 또다시 누군가가 숫자를 들먹이며 주장을 펴게 되면 숫자 없는 주장보다 꽤나 진실에 가깝게 들리기 마련이다. 숫자의 마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허위로 장식된 회계를 우리는 분식회계라고 부른다. 분식회계라는 말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물론 적지는 않다.“왜 분식이냐? 회계부정일 뿐이다”는 주장은 언제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나 회계는 놀랍게도 항목마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도 많아 동시에 스스로를 미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복잡한 회계준칙들이 준엄하게 도열해 있지만 그 어느 항목도 그 자체로는 진실을 밝히고 입증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분식’과 ‘부정’이 말처럼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는 않는다.‘고무줄 회계’라는 말도 있지만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의 맨 아랫줄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가공의 건물을 설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우리나라 기업회계의 역사다.최근의 것으로는 대우그룹의 분식회계가 있었지만 ‘회계는 다만 허수의 세계’라는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것은 김우중 회장이었다. 은행에 내는 것이나 거래처에 제출하는 것들이 모두 ‘목적에 부합되게’ 이뤄지면 회계부정이 되고 만다.정부는 최근 이 회계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회계제도 개선방안이라는 것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름도 거창한 ‘선진화 방안’이다. 사업보고서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책임서명을 의무화하고 회계부정 지시자에 대한 민사책임을 강화하는 등으로 “엄벌하겠다”는 것이 제도개선의 골자다.이외에 감사위원회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기업 내부회계관리제도를 법제화하며 연결재무제표를 분기별로 공시하도록 하는 등의 방안들이 제시됐다. 가능한 모든 방안들이 포함됐지만 전체를 흐르는 기조는 역시 ‘엄벌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엔론 사건 이후 미국의 회계제도 개혁안(Sarba-nes Oxley Act)을 그대로 원용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우리 실정과는 다른 이상한 대목들도 눈에 띈다. 최고경영자 서명제(정부는 인증제라고 이름 붙였다)가 그런 경우다.우리나라는 그동안에도 최고경영자들이 사업보고서에 서명해 왔는데 새삼 다시 서명을 하고 그것을 문서로 제출하라니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선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회계장부 정리가 법대로 됐으니 혹시 나중에 문제가 있다면 나를 처벌하시오”라는 문안이 될 법하지만 무엇이 달라지는지 모르겠다.‘포괄책임’ 또는 ‘무한책임’이라는 말이 좋아 보여서 그런지, 아니면 미국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했다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우리도 서명제 도입하자고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력서는 한 장이면 그만일 뿐이다.이력서와 별도로 “이 이력서는 거짓이 없으니 행여 거짓이 발견되면 나를 처벌하시오” 하는 것이 과연 법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차피 소송에 걸리면 법정에서 일의 경중을 따져 경영자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여부를 판단하면 그만이다.회계의 문제는 그러나 언제나 실수의 세계에 속해 있다. 거래가 투명하지 않은데 회계만 투명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기업경영이 투명하다면 회계 또한 자연히 맑아지기 마련이다.우리의 회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직도 구린 거래, 뒷거래, 잘못된 거래, 장부에 올릴 수 없는 거래가 많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다름아니다. 서류 몇 장 더 첨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