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판매회사들이 만들어 뿌리는 카탈로그는 십중팔구 천덕꾸러기 신세다. 일반 소비자들은 물론 책자를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회원도 별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광고전단과 선심성 인쇄물 속에서 우편함을 어지럽히는 그저 그런 불청객 취급을 받기 일쑤다.이 같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통신판매회사가 상품소개용 카탈로그를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은 무모에 가깝다. 장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일이 현재 일본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통신판매용 책자가 1부에 180엔(약 1,800원)의 값에 팔리고 있으며 그것도 불티나게 팔려나가 유통, 출판업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주인공은 도쿄 시부야에 본사를 둔 ‘카탈로그 하우스’가 발행하는 쓰항 세이카쓰(通販生活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이름). 계간으로 연간 4회 발행하는 쓰항 세이카쓰는 현재 150만부의 발행부수에 135만명의 정기구독자를 자랑하며 만화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책자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 책을 만드는 회사도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이 당연한 사실. 카탈로그 하우스는 2002년 3월 결산에서 363억엔의 매출에 52억엔의 경상이익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14.3%로 일본 통신판매업계에서도 톱클래스를 달렸으며 90년대 후반부터 따져도 이익률이 1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전문가들은 카탈로그 하우스의 책자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을 무엇보다 ‘철저한 차별화’에서 찾고 있다. 소비자들이 꼭 갖고 싶어 할 상품만을 엄선해 게재한 후 다른 책자들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상세한 안내와 설명을 곁들이는 한 우물 파기 방식이 폭넓은 지지와 신뢰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카탈로그 하우스의 책자에 실리는 상품수는 1회 100여점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아도 연간 1,000점을 크게 밑돈다. 보통 한 번에 수천점씩을 게재해 전화번호부를 연상시키는 다른 통신판매회사들의 책자와는 전혀 딴판이다.책자의 특징은 지면구성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다른 책자들이 동종상품을 수십개씩 늘어놓는 것과 달리 쓰항 세이카쓰는 ‘1분야 1상품주의’가 불문율이다. 예컨대 베개의 경우 이탈리아 파베사가 만든 ‘건강 베개’ 하나만을 싣고 있다.한 분야에서 특별히 뛰어난 품질을 갖고 있는 상품만을 족집게처럼 골라 소개하는 식이다. 품질이 좋은 상품만을 취급한다고 백화점이나 전자양판점에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스위스 브라이튼사의 가습기, 시마즈제작소의 광촉매 공기청정기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일반 전자양판점이나 다른 통신판매업체들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상품들이 카탈로그 하우스의 책자에는 곳곳에 숨어 있다. 책자를 넘기는 소비자들이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라며 호기심 섞인 반응을 보일 확률이 다른 책자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높을 것임은 물론이다.책자의 독창성은 상품설명에서도 확인된다. 각 지면의 절반 이상이 상품에 대한 사용방법 및 구조해설, 기능분석 등의 결과로 채워지고 있다. 어린이 동화책처럼 사진이 빽빽이 들어찬 다른 통신판매 책자와는 전혀 컬러가 다른 편집이다.상품설명뿐만이 아니다. 책자의 거의 절반은 상품판매와 관계가 없는 시사문제 등 일반 기사를 다루고 있다.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은폐가 환경보호에 미치는 영향 등 수준 높은 시사잡지에서나 찾을 수 있는 기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기사의 양이 광고와 비슷해야 요금감면 혜택이 주어지는 3종우편물의 자격을 따내기 위한 아이디어였지만 최근에는 이 같은 편집이 매력으로 비쳐지면서 기사를 읽기 위해 책자를 구입한다는 독자들도 적잖을 정도다. 카탈로그 하우스가 톡톡 튀는 차별화 전략을 밀고 나가게 된 배경에는 현대 소비자들의 구매활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각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물질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의 소비자들은 기본적으로 신상품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습니다. ‘꼭 이것을 사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소비자들은 구매에 나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이 회사의 한 임원은 굳어 있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설명과 객관적 데이터가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활자를 통해 정보를 차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카탈로그의 장점인 이상, 이를 최대한 이용하려면 상품수를 압축하고 정보와 신뢰 전달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이 임원은 “카탈로그 하우스를 통해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40대 이상의 주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며 “구매 행위를 자신을 대신해 품질이 좋은 상품을 골라주는 회사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여기는 단골고객도 적잖다”고 털어놓았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상대로 전방위적 판촉활동을 벌이는 것보다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확률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카탈로그 하우스의 차별화 전략이 거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입맛이 까다롭고 눈이 날카로운 단골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좋은 상품을 엄선해 공급한 특유의 ‘안목’이 차별화 전략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이 회사의 혜안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예가 현미용 전기압력밥솥이다. 신상품개발과의 요시카와 미키 과장(여)은 현미를 약간 발아시킨 상태에서 밥을 지으면 영양가도 높고 맛도 훨씬 좋다는 점을 주목하고 지난 99년 시판 중인 밥솥을 전부 비교, 분석했다.그러나 솥 자체가 밥을 짓기 전의 발아기능을 가진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산요전기를 찾아가 발아기능을 가진 전기압력밥솥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산요전기의 업무용 대형밥솥이 채택하고 있는 고기압, 고온에서의 취사 기능, 기술을 가정용에도 적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하지만 산요전기의 담당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까지 그러한 기능의 제품을 만든 적도 없거니와 1개의 통신판매업체만을 상대로 독자적 제품을 개발한다면 채산성이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이 담당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요시카와 과장이 끈질기게 졸라댄데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요구한 제품을 만들어주었다. 2,000개만 팔리면 성공일 것이라는 산요전기의 예측과 달리 이 밥솥은 시판을 시작한 2001년 봄부터 꼭 1년 만에 판매량이 2만개를 넘어섰다.5.5홉 약 1ℓ 용량의 이 밥솥은 가격이 개당 3만9,800엔으로 일반 밥솥에 비해 적어도 30~40% 비싸지만 지금까지 모두 4만여개가 팔렸다. 건강을 위해서는 현미를 먹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미밥을 맛있게 지어주는 솥이 필요하다며 신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신뢰감 있게 제시한 카탈로그 하우스의 삼박자 전략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음은 물론이다.자체개발한 상품만으로 고객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아니다. 이 회사의 상품개발 담당자들은 우수한 제품을 찾아내기 위해 세계 각국의 메이커들을 뒤지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쏟고 있다. 쓰항 세이카쓰는 연간 4회 발행되지만 매회 처음 게재되는 신상품이 전체의 과반수일 정도로 상품물갈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디플레이션 때문에 장사를 못해 먹겠다고 모두들 아우성입니다만 어느 점포를 가 봐도 똑같은 상품을 비슷한 방식으로 팔고 있습니다. 이러니 가격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고 경쟁이 또 다른 경쟁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소수정예화된 상품을 비싸게 팔면서도 승승장구하는 카탈로그 하우스의 한 임원이 들려준 메시지에는 남과 같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암시가 진하게 묻어 있다.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