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점유율 50% 수준 유지, '한우물 파기' 전략으로 업계 이끌어

“60~70년대에는 복사기 시장점유율이 100%였다.”고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이 재직 당시 직원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이다.그러나 이는 결코 농담만이 아니었다. 시장점유율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훨씬 전인 1960년에 설립된 신도리코. 그 시절 시장점유율을 측정할 수 있었다면 100%였을 것이라는 확신과 자부심이 지난해 타계한 고 우상기 회장의 말에 담겨 있는 것이다.설립 후 4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도리코는 복사기 시장에서 줄곧 1위를 지켜왔다. 지난해 12월 누계기준의 시장점유율은 복사기(Plain Paper CopierㆍPPC) 47.3%, 디지털복사기의 시장점유율은 42.7%로 업계 1위. 올해 2월 누계 복사기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말보다 상승해 50%를 기록했다. 디지털복사기 역시 빠른 신장률을 보이며 54%에 이르렀다.“1964년 국내 최초로 복사기 ‘리카피(Ricopy) 555’를 선보인 후 현재 연 10여만대의 복사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없던 시장을 만들어간 회사이기에 1위 유지가 당연한 것이라고요? 사실 1위를 지켜나가는 게 더 어렵습니다.”김성웅 홍보실장은 이렇게 단언했다. 그동안 삼성과 한화, 대우, 롯데 등 대기업이 복사기 시장에 뛰어들며 1위를 위협했다. 그러나 신도리코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불혹에 접어든 신도리코의 역사 속에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 앞에서는 자본의 힘도 무릎을 꿇어야 했기 때문이다.1960년 7월7일 개성상인 가문의 고 우상기 회장은 서울 소공동 사무실에서 직원 19명과 함께 ‘신도교역’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해 8월 미도파백화점 복사기 전시장 개설로 의욕적인 출발은 한 이들은 1962년 일본 리코사와 한국총판계약을 체결했다.고 우회장이 서울의 각 구청에 복사기를 납품할 때 지게꾼과 함께 직접 복사기를 져 나르며 경비를 절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4년 ‘리카피 555’라는 복사기를 생산한 후 전국 상품전시회에서 상공부장관상을 차지하며 한창 피어오르는 경제개발 열기와 함께했다. ‘신도리코’로 상호를 변경한 것은 1969년, 일본 리코사와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40여년이 흐르는 동안 신도리코는 석유파동과 IMF 환란 등 시대적, 경제적 굴곡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두를 지킬 수 있었던 주원인은 ‘한우물 파기’였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는 바로 그것.사세를 확장하면서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는 다른 기업과는 달리 사무기기 오직 한길만 고집해 왔다. 1970년대에는 서울 성수동에 본사와 공장을 건립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고 1980년대에는 팩시밀리의 국산화에 성공, 사무기기회사로 입지를 다지며 아산공장을 기공하게 됐다.60년대에는 집 한 채, 70~80년대에는 자동차 한 대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고가였던 복사기가격이 대중화되면서 신도리코는 성장가도를 달리게 됐다.1990년대에는 정보화 사업에 주력하게 된 신도리코는 1991년 미국 렉스마크(Lexmark)사와 한국총판 계약을 체결했다.특이한 점은 해외 기술로 국내에서 생산한 후 해외 브랜드를 부착하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에서 벗어나 제조자설계생산(ODM) 방식을 택했다는 것. 신도리코 자체 기술력을 해외에서도 인정했다는 얘기다. 전직원의 20%가 R&D(연구ㆍ개발)인력일 정도로 독자적 기술력 축적에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다.2000년대에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전직원의 디지털 교육’이다. 1997년 출시한 디지털복사기가 지난해부터 초고속성장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올 초에는 지난해 대비 무려 425%의 매출신장을 기록했다. 복사기에 프린터와 스캐너와 팩스까지 결합돼 개인컴퓨터와 연동되는 ‘디지털복사기’를 판매하기 위해 대표이사부터 전국 600여개 대리점의 직원이 완벽하게 원리를 이해해야 했다.‘전기, 기계, 화학의 종합예술’인 디지털복사기의 매출성장을 위해 임직원은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다. 교육과정에서 시험을 봐 인사고가에 방영하기도 했다. 디지털마인드를 획득한 직원들은 ‘제안영업’을 하고 있다. 고객의 사무실에 꼭 필요한 기기의 종류를 선별해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직원의 창의력 제고도 1등기업의 비결이다. 우석형 사장은 크리에이티브는 곧 연구와 생산력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1999년 7월 서울본사 및 공장의 증개축공사를 통해 첨단 생산 시스템의 확보와 갤러리, 체육관 등의 각종 문화ㆍ복지시설 건립을 동시에 꾀했다. 김진옥 영업관리부 주임은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은 쾌적한 서울 본사와 공장은 아이디어 생산에 크게 기여한다”고 말했다.2000년대 들어 프린터 시장 점유에도 힘쓰고 있다. 2000년 11월 세계 프린터 시장점유율 2위를 달리고 있는 미국 렉스마크사와 레이저프린터 ‘블랙풋’의 수출계약을 체결해 본격적인 프린터 시장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그결과 9월에는 레이저프린터 블랙풋이 수출되기 시작했으며 11월에는 국내에도 출시, 프린터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신도리코의 지난해 매출액은 5,073억원, 올해 매출목표는 6,200억원이다. 지난해 9월 중국 칭다오에 공장을 건립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대륙 5만여평에 레이저프린터와 카트리지 공장이 들어설 예정.신도리코의 1,500여 임직원은 ‘대한민국 사무기기의 역사가 곧 신도리코의 역사’라는 포부를 가슴 깊숙이 담고 있다. 이들은 ‘국내 최초’에서 ‘세계 최초’로 거듭나기 위해 이 순간에도 기술력을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