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쟁으로 전세계가 어수선하다. 이런 가운데 우리 금융기관은 한쪽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다름 아닌 ‘연체와의 전쟁’이다.금융기관들의 ‘연체와의 전쟁’ 상황이 심상치 않다. 정씨가 다니는 은행처럼 카드를 포함한 가계대출 연체율을 낮추기 위해 전직원이 동원되기도 하고, 아예 전담인력을 보강하는 금융기관들도 늘고 있다.물론 대다수 금융기관들이 3월 결산을 앞두고 집중적인 연체관리를 하는 관행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최근 금융기관들은 어느 때보다도 연체율 관리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국민은행은 김정태 행장이 3월 월례조회에서 연체문제를 직접 언급하며 “연체 축소에 총력을 기울여라”고 지시했다. 우리은행도 지난 2월 중순 전체 영업점에 연체율 감축 목표를 할당하는 한편 연체관리 실적을 영업점 평가에 10% 반영하기로 했다.LG카드, 삼성카드를 필두로 대부분의 카드사들은 3월17일 정부의 ‘신용카드 종합대책’이 발표된 이후 경영개선을 위해 대대적으로 채권관리를 강화하고 나섰다. 구경회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올해 금융기관의 최대 화두는 연체율”이라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 업계는 당연히 긴장하고 대책마련에 부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최근 경기위축 및 신용경색 심화와 맞물려 가계의 빚 상환 부담이 커지고 있어 가계대출 연체문제는 금융시장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연말부터 상승하기 시작한 신용카드를 비롯한 가계대출 연체율이 좀처럼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체율 비상이 가장 먼저 걸린 전업신용카드의 경우 지난 연말 9~10%(1개월 이상)였던 연체율이 올 2월에는 13~14%로 치솟았다.은행계 신용카드의 연체율도 크게 뛰었다. 지난 2월 말 은행계 신용카드 연체율(1개월 이상)은 11.9%로 전달보다 1.7%포인트 높아졌다. 2001년 말 4.1%였던 은행계 신용카드 연체율은 지난해 6월 말 5.3%, 11월 말 8.4% 등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은행의 카드 부문을 뺀 가계대출 연체율도 올 들어 두달 사이 0.6%포인트 올라 2.1%를 기록했다.할부금융과 저축은행의 연체증가율도 카드사와 은행 못지않게 심상찮다. 할부금융의 경우 1개월 이상 가계대출 연체율이 평균 20%를 넘어서고 높게는 25%까지 육박하는 등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으로 나타났다.할부금융업계의 연체율은 지난해 6월까지만 해도 6~7%대로 매우 양호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각 할부사가 카드론(loan) 부문을 대폭 늘리면서 위험관리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저축은행은 정확한 연체율 통계가 집계되지 않지만, 상호저축은행중앙회 관계자는 “300만원 이하의 소액대출 연체율이 최근 들어 급상승해 할부금융보다 높은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한다.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연체율도 상승하고 있지만 더욱 심각한 사실은 가계가 빚 상환 능력을 잃어 연체가 실제 상환불능으로 바뀌는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은행만 해도 지난해 말 원화대출 잔액은 357조4,000억원으로 이 가운데 가계대출은 52.9%에 해당하는 189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가구당 평균부채는 3,000만원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경우, 수익성 악화는 불 보듯 뻔하다. 빚 받아내기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최근 금융기관은 연체와 관련해서 ‘어르고 달래는’ 양동작전을 펼치고 있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빚 상환기간을 늘려주기도 하고 일부 상환액을 줄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휴일에도 상환 독촉전화를 돌려대고 경우에 따라 찾아나서기도 한다.수익성 악화 우려, 연체율 축소에 총력국민은행이 4월중부터 3개월간 대대적인 신용불량자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할 예정이며 조흥은행도 3월26일부터 연체자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은행 우리은행 등도 연체고객을 대상으로 자체적인 신용회복 지원제도를 시행 중이다.김정욱 국민은행 NPL팀장은 “다중채무자들은 ‘개인워크아웃’이라는 갱생지원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한 개의 금융기관에만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경우에는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며 “이들을 상환능력에 맞춰 구제해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세부지침 조율이 끝나는 대로 곧 시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은행들이 지점마다 연체율을 따져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등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연체축소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리은행은 3월부터 모든 채무자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 이자납부일 등을 알려주고 있다.5,000만원 이상의 고액 연체자들은 본부 콜센터가 직접 독촉전화를 하는 ‘특별관리’ 대상이다. 조흥은행은 채무자의 급여가 다른 은행으로 입금되는 등 변동이 생기면 곧바로 부실징후 고객을 점검하는 ‘사전 모니터링’에 들어간다. 1개월 이내 단기연체에 대한 관리인원도 30명에서 200명으로 대폭 늘리기로 했다.카드사들도 연체부터 잡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각 사별로 이용한도 축소 등은 물론 연체감축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 운영, 신용갱생제도 확대 등 회사의 모든 역량을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LG카드는 지난해 말 채권 전담인력을 추가로 300명 선발했다. 또한 지점별로 채권회수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등 전체 조직을 채권회수 총력체제로 전환했다. 삼성카드도 콜센터와 영업직원 250명을 채권추심인력으로 바꿨다.국민카드는 채권회수 조직을 종전 14개에서 24개로 확대개편하면서 채권관리사를 3,000명으로 늘렸다. 외환카드도 채권회수전담팀을 9개에서 27개로 3배나 늘려 연체채권 회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할부금융사 가운데 현대캐피탈의 경우 연체관리를 위해 채권관리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전면 개편했고, 삼성캐피탈도 최근 채권추심에 전문성을 기하기 위해 아웃소싱을 주고 리스크관리 체제를 정비하는 등 연체율 감소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그러나 이처럼 금융기관들이 연체율 관리에 양동작전을 펼치고 있지만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복환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사무국장은 “여러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린 다중채무자들이 적잖은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개별기관이 아무리 빚을 회수하려고 노력해도 금융기관끼리 잘 협조하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연체율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실제 전국은행연합회 발표에 따르면 2월 말 현재 1인당 신용불량 등록건수가 3.87건으로, 지난해 12월(3.65건)과 1월(3.76건)에 이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갈수록 연체로 내몰리는 다중채무자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