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째 두 자릿수 성장 이끈 지휘자

세계 제1의 화장품회사 로레알이 2002년 14억6,000만유로의 순이익을 올렸다. 이는 전년보다 18.7%가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이 같은 경영실적을 듣고도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다. 18년째 두 자릿수 성장행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도 17년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1987년 증시에 상장된 로레알의 주가는 올 들어 22배나 뛰었다.애널리스트들은 로레알의 성공배경으로 마케팅 차별화와 연구개발(R&D)을 통한 기술력 확보, 브랜드 특화, 시장다변화를 꼽는다. 로레알은 랑콤, 조르지오아르마니, 폴로, 비오템, 랄프로렌 등의 고급 브랜드 제품을 비롯해 중저가 로레알파리와 메이블린, 약국 판매용 메디컬 브랜드 등 총 15개의 핵심 브랜드를 갖고 있다.로레알은 1907년 소규모 모발염색약 제조업체로 출발했다. 이 회사가 세계 최대의 화장품업체로 성장한 데는 천재적 경영인 린제이 오웬 존스 회장(57·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유럽에서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나이’ 또는 ‘마술지휘봉을 휘두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불린다. 취임 후 줄곧 두 자릿수의 성장을 기록해 얻은 별명이다.오웬 존스 회장은 영국인으로 프랑스 최고기업의 수장에 오른 독특한 CEO다. 그는 첫 직장을 로레알에서 시작해 그룹 회장까지 올랐다. 프랑스 기업문화로 볼 때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1988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적 기업의 회장에 오른 것도 프랑스 기업사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이다. 요즘 프랑스에서도 파격적인 연령파괴 인사가 종종 있지만 당시만 해도 프랑스 제계가 깜짝 놀랄 정도의 이변이었다.1969년 프랑스 인시아드대학원을 졸업한 오웬 존스 회장은 동급생으로부터 “화장품회사에 입사하면 유명모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로레알에 발을 들여놓았다. 영국 옥스퍼드대 시절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지만 프랑스유학을 결정하면서 꿈도 함께 접었다.오웬 존스 회장은 입사 당시 로레알의 간판브랜드인 돕(Dop)의 영업담당으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업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이듬해 벨기에 지사를 지원했는데 이곳에서 그의 능력을 십분발휘했다. 현지 정착 1년도 채 안돼 로레알 헤어케어제품을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은 것이다.당시 그를 눈여겨본 프랑스와 달 회장은 1972년 그를 본사로 불러 프랑스 시장 헤어컨디셔너 재런칭 프로젝트를 맡긴다. 이때 로레알은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부으며 신제품 헤어컨디셔너를 출시했지만 시장반응이 없어 그만두기 직전이었다.그는 즉시 대대적인 광고를 중단하고, 1회용 샘플을 나눠주는 직접 마케팅으로 전환했다. 헤어컨디셔너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비자들에게 아무리 광고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판단에서다.소비자들에게 샘플을 사용하게 한 후 시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전략이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프랑스와 달 회장과 독대할 정도로 전격적인 신임을 얻었다.오웬 존스 회장은 1974년 더욱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돕(Dop)과 메넨(Menneen), 나르타(Narta)를 총괄하는 스카드사업부에서 제때 신제품을 출시하지 못해 경쟁업체로부터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던 상태였다.스카드사업부 회생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부임 첫날 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Back to basics’(기본으로 돌아가자)를 외치며 관리직 직원들에게 “출근해 사무실에만 있지 말고 제품이 판매되는 매장에 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발로 뛰라”고 지시했다.그는 “피와 땀, 눈물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전직원을 채근하면서 동시에 뛰는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채찍과 당근 정책을 펼치며 기업문화를 완전히 바꿔나갔다. 스카드사업부는 1년 만에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다.1978년 이른 봄 프랑스와 달 회장이 다시 오웬 존스를 찾았다. 프랑스와 달 회장은 그에게 이탈리아지사가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며 이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도 있지만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었다.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대규모 폭력시위와 총파업 관련 기사가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로레알의 이탈리아지사 사이포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사분쟁은 가장 먼저 생산에 영향을 끼쳐 시장에 상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판매율도 매우 저조했다. 당장 비상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이탈리아지사가 파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그가 이탈리아지사에 부임하자 현지 관리직 직원들은 “노조가 새파란 영국인 사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며 공장방문 자제를 당부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책임영역을 확실히 밝혔다. 그리고 사태수습과 생산 정상화로 당초 회사에서도 기대하지 못한 흑자경영까지 이뤄냈다.프랑스와 달 회장은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오웬 존스를 장차 자신의 후임자로 점찍어 놓고 미국지사 코스메르를 맡겼다. 일종의 마지막 테스트 같은 것이었다. 1981년 뉴욕에 도착한 그는 미국 시장의 화장품 유통체제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파악하고 고급브랜드 랑콤을 간판브랜드로 내세웠다.유럽에서 펼쳤던 전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고급브랜드의 부각전략은 로레알이 미국 시장에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4년 퇴임을 앞둔 프랑스와 달 회장은 오웬 존스를 다시 파리 본사로 불러들였다. 이에 앞서 프랑스와 달 회장은 최대주주이자 창업자의 외동딸인 일리안 베탕쿠르에게 오웬 존스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이미 동의를 얻어뒀다.그러나 그는 퇴임 직전 부회장 샤를르 즈비악이 4년간 임시 최고경영자직을 맡도록 했다. 불과 38세밖에 되지 않은 그가 그룹을 이끌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88년 로레알 사외이사진은 만장일치로 린제이 오웬 존스를 그룹회장으로 임명했다. 1969년 로레알 입사 이래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승리만 거듭한 그였기에 언젠가 그룹회장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바였지만 42세의 젊은 영국인이 프랑스 기업 경영권을 맡는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였다.그는 로레알의 최고경영권을 손에 쥐자 이스라엘 시장 개척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펼쳤다. 주주들과 사내 경영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진출을 결정했다.그때까지만 해도 로레알은 아랍국가 소비자들의 보이콧이 두려워 이스라엘과는 전혀 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의 결정은 옳았다. 우려했던 아랍국가에서의 불매운동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는 천사기업으로 대환영을 받았다.그는 1990년대 초반 로레알 세계화 전략을 발표하며 “프랑스 로레알은 로레알그룹의 일개 지사에 불과하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는 과거 생산에서부터 마케팅,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프랑스에서 하던 것을 지역별 특성을 고려해 현지화한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오웬 존스 회장이 이끄는 로레알은 퇴보를 모르고 전진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럽의 유명 비즈니스스쿨들이 로레알의 성공적인 세계화 전략을 MBA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린제이 오웬 존스 로레알 회장은 ‘유럽의 잭 웰치’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