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이 가진 美의 속성 꿰뚫어 봐…언론은 혹평했지만 고객들은 폭발적 반응 ‘대히트’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샤넬⑤
샤넬의 블랙드레스.
샤넬의 블랙드레스.
샤넬 넘버 파이브(N˚5)는 대성공을 거뒀다. 업계에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객 주문이 쇄도했다. 생산량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샤넬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파리의 갤러리 라파예트의 소유주인 테오빌 바데를 만났다. 라파예트에서 향수를 만들면 고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대량 생산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샤넬은 바데에게 향수 공급을 요청했다. 하지만 바데는 향수를 제조하는 에르네스트 보의 공장을 둘러본 뒤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장이 가내 수공업에 가까울 정도로 허술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바데는 샤넬에게 프랑스 최대의 화장품과 향수 공장을 갖고 있는 베르트하이머 형제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샤넬과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뜻이 맞았다. 즉각 ‘샤넬 향수’라는 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샤넬의 향수는 기존 부티크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브랜드가 됐다. 결과적으로 샤넬과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윈-윈’했다. 샤넬 측은 넘버 파이브 제조 공식을 양도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양도받은 제조 방법을 현대화 했다. 향수는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갔다. 베르트하이머는 샤넬의 이름을 단 다른 향수들을 내놓기로 했다. 샤넬에게 모든 수익의 10%를 주는 조건이었다. 샤넬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28년 샤넬과 연인 웨스트민스터 공작.
1928년 샤넬과 연인 웨스트민스터 공작.
보잘것없는 액세서리에서 美의 극치 만들어 내

샤넬은 1924년 액세서리라는 켈렉션 하나를 추가했다. 그의 액세서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보잘것없는 것을 사치스럽게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폴 푸아레(1879~1944년)는 “결핍의 사치를 발견했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샤넬은 오히려 이 말을 마음에 쏙 들어했다.

샤넬은 액세서리를 통해 보잘것없는 것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만들어 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패션 소품에 인조 보석을 사용하는 과감한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진짜 보석이 아닌 모조품을 사용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샤넬은 진짜 보석을 선호하는 풍토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왜 그렇게 다이아몬드에 현혹돼야 하나. 목에 수표를 걸고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의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샤넬의 진주 목걸이 주문이 쇄도했다. ‘코코샤넬’의 저자 카나리나 칠코프스티는 “어린 소녀의 뺨처럼 수줍게 아른거렸다”고 표현했다. 샤넬의 액세서리 컬렉션이 성공을 거둔 데는 디자이너 에티엔 드 보몽 백작의 역할이 컸다. 액세서리 컬렉션 책임을 맡은 그는 색색의 보석, 비잔틴 십자가로 장식한 긴 진주 목걸이를 비롯해 많은 ‘히트작’을 만들어 냈다. 그의 이런 작품들은 샤넬 장신구의 고전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넬에게 1924년은 또 다른 계기가 된 해다. 섣달 그믐날 모나코의 호텔에서 영국 귀족 휴 리처드 아서를 만난 것이다. 아서는 영국 왕의 사촌으로, 정복왕으로 불리는 윌리엄 1세 증손자의 후손으로 알려졌고 웨스트민스터 제2대 공작이다. 그의 조부는 왕실의 고관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아 1831년 웨스트민스터 작호를 받았다. 아서는 조부의 애마 이름을 따 ‘벤더’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가는 함대를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다. 영국 최고의 부자로 꼽혔다. 재산이 얼마나 될지 계산이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전 유럽에서 가장 부자라는 얘기도 있었다. 아서가 샤넬을 자신의 요트인 ‘플라잉 클라우드’로 초대하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즈음 아서는 둘째 부인 바이올렛 메리와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다. 이혼한 뒤 아서는 샤넬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샤넬은 거절했다.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사업을 제대로 꾸려 나가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 지내다가 1929년 아서의 바람기 때문에 헤어졌다.

당시 두 사람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소문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서는 샤넬에게 진귀한 인도산 에메랄드나 루비 또는 사파이어로 만든 팔찌 등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귀중한 패물을 선물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그럴때마다 샤넬은 무시했다.

아서는 영국 트위드 강가에 있는 섬유 공장을 사들였다. 물론 샤넬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생산되는 직물 트위드는 거칠고 불규칙한 모사로 만들어지는 단순한 것에 불과했다. 트위드 직물을 만드는 공장은 이미 유럽 여러 곳에 있었다. 샤넬이 관심을 가진 것은 트위드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이곳의 수질은 다른 곳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직물을 만드는 데 뛰어났다. 샤넬에게는 옷감이 중요했고 이 물을 이용해 만든 직물은 품질이 우수했다. 트위드 직물로 만든 치마와 상의는 샤넬 컬렉션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했다.

샤넬 의상이 주목 받은 또 다른 계기는 1925년 4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 미술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는 문화혁명으로 불릴 만큼의 혁신적이었다. 의상뿐만 아니라 장신구·가구·건축 영역 등 장식 미술 분야에서 ‘아르테코’로 불리는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
샤넬의 트위드 자켓.
샤넬의 트위드 자켓.
“검은색과 흰색, 조화롭고 순수한 아름다움 지녀”

샤넬은 이 박람회에 의상을 출품했다. 잔 랑뱅, 폴 푸아레 등 쟁쟁한 디자이너의 의상과 나란히 선보인 것이다. 샤넬은 박람회 1년 뒤 획기적인 아르데코 스타일을 선보였다. 바로 ‘리틀 블랙’의 탄생이다. 주로 상복으로 사용되던 검은색을 여성들의 일상복에 도입했다는 의미에서 ‘리틀 블랙’으로 불렸다. 패션 디자인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패션 잡지 보그는 1926년 1월 ‘리틀 블랙’을 포드 자동차의 탄생과 비견할 만하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하층민들의 색으로 치부돼 온 검은색에 대해 샤넬은 달리 봤다. 검은색이 가진 특별한 속성을 꿰뚫어 봤다. 검은색은 반작용으로 피부를 더 아름답게, 몸매를 더 호리호리하게 돋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샤넬은 ‘리틀 블랙’을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단순하고 확실한 선을 원한다? 그럼, 그런 걸 만들어 주면 될 게 아닌가. 여성들은 색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검은색은 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검은색은 모든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색이다. 흰색도 마찬가지다. 둘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완전하면서도 조화로운 색들, 검정이나 흰색을 입고 무도회에 가는 여성들은 가장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샤넬이 다시 한 번 고정관념을 깼지만 언론은 어떻게 그런 옷을 만들 수 있느냐며 혹평했다. 하지만 고객들은 샤넬의 손을 들어줬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색을 원했고 검정 드레스가 대히트하면서 샤넬은 또 하나의 패션 역사를 썼다.
샤넬 아르데코 스타일 ‘리틀 블랙’, 패션 혁명 일으키다[명품 이야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