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코로나19 백신의 글로벌 가치사슬...현실된 ‘백신 국가주의’
지난해부터 전 세계로 확산되며 장기적인 팬데믹(세계적 유행) 사태로 이어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백신 접종이 국가별로 시차를 두고 시작됐다.

코로나19 백신은 백신 개발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선진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단시일 내 개발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백신의 생산·유통·보관·접종 이후의 경제 활동 등과 관련해 국제 경제 측면에서 다양한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먼저 백신 생산 과정에서 다른 산업의 다국적 기업과 같이 제약업계도 이미 글로벌 가치 사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백신 생산과 관련된 국가 간 글로벌 가치 사슬을 살펴보기 위해 관련 국가를 백신을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성분(ingredients)을 생산하는 국가, 이러한 핵심 성분을 이용해 최종적으로 백신을 생산하는 국가, 핵심 성분과 최종 백신을 모두 생산하는 국가, 백신 생산과 전혀 관련 없는 국가 등 4가지 국가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계은행의 연구에 따르면 백신을 만드는데 필요한 성분을 수출하는 국가는 주로 제약업이 발달한 소수의 국가에 한정돼 있다. 백신 성분 관련 무역 비율은 유럽연합(23.1%), 미국(22.4%), 싱가포르(14.4%), 중국(9.4%), 영국(5.9%), 일본(3.5%), 한국(2.4%) 순이다.

백신 생산 기업의 자회사 역시 캐나다(42개), 중국(17개), 호주(16개), 영국(15개) 등에 분포하고 있다. 백신 생산 과정의 국제화 수준은 높지만 소수의 국가에 한정돼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유럽연합(EU)·인도·미국 등 코로나19 백신 생산 국가는 충분한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백신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EU는 지난 1월 말 이후 역내에서 생산된 백신이 수출될 때 회원국의 승인을 받도록 정했다. 인도 역시 자국에서 생산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수출을 일시 중단한 적이 있고 전 세계 백신의 27%를 생산 중인 미국의 백신 수출 실적은 전혀 없다. 이처럼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지난해 초 국제 협력이 아닌 ‘각자도생’의 길을 택했던 선진국이 다시 백신 국가주의(nationalism)를 강화하고 있다.

백신 국가주의에 맞서 백신 생산과 무관한 개발도상국은 백신 관련 지식재산권의 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즉, 다른 제조사에 백신을 생산하거나 복제품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하자는 주장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 등이 적극적으로 이를 주장하고 있고 국경 없는 의사회와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백신 개발 과정에서 엄청난 재정적 비용을 감수한 미국과 EU 등의 선진국은 이러한 주장에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코로나19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면제와 관련된 강제 실시권을 논의하고 있지만 허용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또한 EU와 미국 등은 백신 접종 확산에 따라 ‘코로나19 백신 여권’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WHO는 ‘현 체제 속의 국가 간 불평등과 불공정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백신의 개발·생산·유통·접종으로 코로나19에 맞설 것으로 전망됐던 세계 질서가 또다시 혼돈으로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코로나19의 백신 확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도 향후 논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파악해 백신과 관련해 우리의 거버넌스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