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고부가 가치 기술력에서 中·日 따돌려…수에즈운하 사태로 반사 이익 기대도

[비즈니스 포커스]
기지개 켠 한국 조선업, 신조선 수주 ‘싹쓸이’
지난해 주춤했던 한국 조선 산업이 1분기 들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그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기 둔화와 유가 하락 등으로 침체됐었지만 올해 들어 신조선 수주를 싹쓸이하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지개 켠 한국 조선업, 신조선 수주 ‘싹쓸이’

1년 전에 비해 10배 늘어난 수주량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 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에서 총 1024만CGT(표준선 환산톤수·323척)가 발주된 가운데 한국 조선사들은 532만CGT(126척)를 수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주율은 55%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눈에 띄는 점은 1년 사이 급격히 높아진 수주율이다. 지난해 1분기 한국 조선사들은 전 세계 발주량 413만CGT 중 52만CGT를 수주하며 13%의 수주량을 차지했다. 1년 사이 수주량이 10배로 급성장한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이번 1분기 수주 실적은 2006~2008년 이후 13년 만에 1분기 기준 최대 기록이다. 10년이 넘게 이어진 불황의 터널에서 조선업이 벗어날 조짐을 보인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1분기 한국 조선사들의 수주 낭보 소식도 이어졌다. 삼성중공업은 단일 선박 건조 계약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삼성중공업은 3월 26일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을 한 번에 수주했다고 밝혔다. 삼성중공업은 대만 선사 에버그린으로부터 1만5000U급 컨테이너선 20척을 총 2조8000억원에 수주했다. 해운 산업 외신인 로이즈리스트에 따르면 삼성중공업은 중국 국영 조선소 후동중화조선·강남조선, 일본 이마바리조선과의 경쟁 입찰에서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삼성중공업이 수주한 컨테이너선은 연료 절감 기술과 차세대 스마트십 솔루션 ‘에스베슬(SVESSEL)’이 탑재된 스마트 선박이다. 선박들은 2025년 6월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될 예정이다. 영국의 조선 해양 시황 분석 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중공업은 올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1만2000TEU급 이상(neo-panamax급) 대형 컨테이너선 총 66척 중 절반(34척)을 수주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

이 밖에 대만 선사 완하이라인도 선단 효율 계획의 일환으로 현대중공업을 통해 컨테이너선 5척 발주를 확정했다.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으로 2023년 1분기에 인도될 예정이다.

고부가 가치 선박 수주 소식도 들려온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 중간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5660억원 규모의 선박 7척을 수주했다. 한국조선해양은 최근 아시아·유럽·아프리카 소재 선사들과 9만8000㎥의 초대형 에탄 운반선(VLEC) 2척, 9만1000㎥급 초대형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 2척, 2만3000㎥급 소형 LPG 운반선 1척, 5만 톤급 석유화학 제품 운반(PC)선 2척에 대한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고 4월 1일 밝혔다.

이번에 수주한 에탄 운반선은 올해 전 세계에서 처음 발주된 것으로 길이 230m, 너비 36.6m, 높이 22.8m 규모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건조돼 2022년 4분기부터 순차적으로 선주사에 인도될 예정이다. 에탄 운반선은 액화한 에탄(ethane)을 섭씨 영하 94도로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운반하는 고부가 가치 선박으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요구된다. 한국조선해양은 이 선박을 포함해 지금까지 총 7척의 초대형 에탄 운반선을 수주했다.

연이은 선박 수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사들은 벌써부터 올해 수주 목표 달성에 성큼 다가섰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수주한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3척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42척, 51억 달러(약 5조7000억원)어치를 수주하며 올해 목표 78억 달러의 3분의 2(65%)를 달성했다. 수주 잔액도 258억 달러로 늘어나 최근 5년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지개 켠 한국 조선업, 신조선 수주 ‘싹쓸이’

고부가 가치 선박으로 입증한 기술력
전 세계 해운 조선업계가 친환경·고부가 가치 선박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그간 한국 조선사들이 집중해 온 선박 제조 기술력의 향상이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조선업의 불황으로 지적된 것은 중국 조선소들의 저가 수주였다. 가격을 무기로 점유율을 높인 중국 조선소들은 한국 조선업계의 가장 큰 경쟁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올해 1분기 들어 한국 조선사들의 수주량이 중국 조선소의 수주량(426만CGT)을 뛰어넘으면서 선주들도 가격보다 기술력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분기 수주량에서 고부가 가치 선박들은 큰 몫을 차지했다. 한국 조선사들의 1분기 전체 수주량 532CGT 중 80%인 426만CGT가 고부가 가치 선박에 해당한다. 운임 상승에 따라 발주가 증가한 컨테이너선은 77척, 고부가 가치 선박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LNG선 2척,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23척 등 전 세계 발주량의 100%를 수주했다. 또 LNG·LPG 등 친환경 연료 추진선도 전 세계 발주량 269만CGT 중 78%인 221만CGT를 수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글로벌 물류업계에 큰 타격을 입힌 수에즈 운하 사고가 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 조선소의 역량을 부각시킬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3월 24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에서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좌초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당시 수에즈 운하에서 대기 중이던 선박 422척의 발이 묶여야만 했다. 수에즈 운하는 해상 물류 루트의 핵심인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가장 빠른 길로, 하루 평균 통행량만 40~50척에 이른다.

수에즈 운하에서 멈춰 선 선박은 일본 이마바리조선에서 건조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다. 에버기븐호는 3월 29일 부양됐지만 차질을 입은 물류망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수에즈 운하 관리청은 자세한 사고 원인을 분석 중인데 사고 직후 강풍과 기술적 결함 등을 지적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일본 조선업계의 기술력에 의문부호가 붙게 됐다. 박무현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일본에서 건조된 선박이 바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선박 품질의 신뢰성이 사라졌다”며 한국 조선업으로의 선박 주문량이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저가 수주로 점유율을 넓힌 중국 건조 선박들이 잦은 고장을 일으킨 사례와 함께 이번 수에즈 운하 사태로 일본 조선소 또한 기술력에 타격을 입게 됐다. 한국 조선소로서는 반사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클락슨은 올해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2020년의 2044만CGT 대비 54.1% 증가한 3150만CGT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초 전망이었던 2380만CGT 대비 32.4% 상향 조정된 수치다. 당분간은 조선 산업의 회복세가 지속될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조선 산업은 발주가 이어진 후 1~2년간 쉬는 휴지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하반기 들어 수주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