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러시아는 특허 포기에 긍정적…특허보다 생산 노하우나 시설이 근본적 문제란 지적도

[글로벌 현장]
미국은 ‘포기’, 유럽은 ‘반발’…코로나19 백신 특허의 운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특허 문제를 두고 미국과 동맹인 유럽이 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이 백신 특허 보호를 한시적으로 중단하자고 밝혔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주요국이 반발하면서다. 화이자 등 백신 개발사와 제약업계도 특허 공유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특허가 문제가 아니라 수출 규제가 더 문제라고 맞서고 있다.
백신 외교에 시동 건 바이든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5월 5일(현지 시간) 제약사의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한시적 특허 포기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캐서린 타이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이날 성명에서 “지식재산 보호를 강력히 믿지만 대유행 종식을 위해 제약사의 백신 지식재산권 포기를 지지한다”고 했다.

미국이 제약사의 코로나19 백신 특허 포기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백신 외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뜻으로 분석된다. 저개발국이 백신난을 겪는 상황에서 화이자·모더나·존슨앤드존슨 등 주요 백신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독식하다시피하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저개발국에 백신을 적극 풀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개발도상국은 지난해 10월부터 백신 지재권 보호 중단을 요구해 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앞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6000만 회분을 다른 나라에 지원하기로 했다. 백신 특허 공유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로 평가된다.

국제기구는 일제히 환영하고 나섰다. 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미국의 결정에 대해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기념비적 순간”이라고 밝혔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도 “(USTR이) 코로나19 대유행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지재권 협정의 한시적 면제를 지지하는 측과 기꺼이 협력하려는 것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늦어도 올해 12월 전에 백신 특허 문제에 대한 합의가 도출될 수 있도록 회원국들과 협의하겠다고 했다. WTO는 12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통상장관 회담 때까지 백신 특허 포기와 관련한 최종 합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실제 특허 포기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백신 생산과 공급을 늘리기까지는 ‘첩첩산중’이다. 당장 독일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독일 정부는 미국의 특허 유예 방침 하루 만에 “지재권 보호는 혁신의 원천이며 (미래에도) 그렇게 유지돼야 한다”며 반대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현재 백신 생산을 제약하는 요소는 생산력과 높은 품질 기준이지 특허가 아니다”고 했다. 이틀 뒤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직접 “특허권을 그냥 제공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백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해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또 많은 미국인들이 백신을 접종한 만큼 미국이 백신 시장을 개방하기를 희망한다고 미국을 겨냥했다.

미국의 핵심 우방인 영국도 바이든 행정부의 백신 특허 포기 구상에 화끈한 지지를 표시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19 백신 생산과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 및 WTO 회원국들과 논의해 왔다”는 원론적 방침만 내놓았다.

독일은 미국 제약사 화이자와 함께 메신저 리보핵산(mRNA)이란 신기술로 코로나19 백신을 공동 개발한 바이오엔테크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종주국이다. 독일과 영국은 자국 기업이 갖고 있는 특허 포기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다른 유럽 주요국도 부정적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5월 7~8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특허가 우선순위가 아니다”며 미국의 제안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어 “미국에 백신뿐만 아니라 백신 원료 수출 금지도 중단할 것을 분명히 요구한다”며 “이것이 생산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도 “백신을 자유롭게 하기 전에 미국과 영국이 수출 규제를 제거하는 등 더 단순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며 “특허를 푸는 것이 백신 생산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특허 포기가 “특효약이란 생각에 의문을 품고 있다”며 “모두가 백신 수출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백신 특허 포기 지지를 밝힌 직후만 해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해 EU 집행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후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시각으로 돌아섰다.
미국은 ‘포기’, 유럽은 ‘반발’…코로나19 백신 특허의 운명은
미국은 ‘포기’, 유럽은 ‘반발’…코로나19 백신 특허의 운명은

"특허 포기보단 기술 이전이 현실적"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백신 특허 포기에 긍정적이다.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브리핑에서 “중국이 백신 특허 포기를 검토할 것이냐”는 질문에 “중국은 백신 접근성 문제에 대한 노력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WTO에서 모든 당사자 간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기대한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백신 특허 보호 중단에 대해 “러시아는 당연히 그런 접근법을 지지할 것”이라며 행정부에 이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시노팜과 시노백, 러시아는 스푸트니크V 백신을 보유하고 있지만 자국 백신의 특허 공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같은 중국과 러시아의 행보에는 팬데믹 위기에서 국제 사회에 ‘백신 리더십’을 보여 주는 동시에 백신 특허가 공개되면 화이자와 모더나가 백신 개발에 사용한 mRNA 신기술에 접근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화이자와 모더나는 백신 특허를 공개하면 이 기술을 중국과 러시아에 넘기는 꼴이라는 우려를 미국 정부에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통신은 미 행정부와 업계의 질의응답 문건을 입수해 바이든 행정부가 한시적 특허 공유에 따라 백신 신기술이 중국과 러시아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백신에 대한 특허 보호가 중단되면 수혜를 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국에 바이오 의약품 위탁 생산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데다 수년간 경험을 쌓은 바이오시밀러 업체들이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핵심 관건은 WTO에서 특허 공유 논의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논의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제약 회사들이 가진 코로나19 백신 특허는 WTO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협정(TRIPS)의 보호를 받는다. 특허 보호를 중단하기 위해선 164개 회원국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 타이 USTR 대표도 백신 특허 공유 방침을 밝히면서 WTO 회원국 간 합의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인정했다.

제약사들의 반대도 변수다. 국제제약협회연맹은 성명을 통해 “코로나19 백신을 세계에 신속하고 공평하게 나누자는 목표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지재권 포기에는 “틀린 해법”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무역 장벽 제거, 공급망 병목 현상 및 백신 원료 부족 해소, 빈국과 백신을 나누려는 부국의 의지가 해법이라고 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도 특허를 공유한다고 해서 백신 생산이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이자 측은 “백신 제조 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기업들이 원재료를 찾아다닐 것”이라며 원료 쟁탈전과 제조 안전성에 대한 위협을 문제로 지적했다. 화이자 백신을 공동 개발한 독일 바이오엔테크도 백신 제조 과정이 복잡해 기본적 요건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백신의 품질·안전성·효과에 악영향을 줄 위험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실제로 특허를 포기해도 각국이 백신 생산 노하우와 기술, 시설 등을 갖출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특허 포기가 아니라 제약사들이 특허료를 받고 기술 이전을 통해 라이선스 생산을 늘리는 게 현실적이란 시각도 있다.

특허 포기가 미래 팬데믹에 대처할 제약사와 바이오 기업의 혁신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의 백신 특허 도둑질’이란 사설에서 “다른 정부가 (특허를) 훔치는 것을 백악관이 돕는다면 누가 미래의 치료제에 투자하겠느냐”고 비판했다. 또 “모더나나 화이자의 mRNA 백신 같이 돌파구를 마련한 혁신적 지재권은 한 번 도난당하면 되돌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워싱턴(미국) =주용석 한국경제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