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안 갚으려고 폐업 후 다시 개업한 전 씨
대법 “새 회사가 갚아야”

[법알못 판례 읽기]
그래픽=전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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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피하기 위해 기존에 운영하던 개인 사업체를 폐업하고 다른 회사를 차렸다면 새 회사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건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모 씨의 남편은 2012년 10월 안 씨를 대리해 토지와 건물을 매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안 씨 측과 계약한 전 모 씨가 “부동산 매매 대금 및 공사비용을 당장 지급하기는 어렵다”고 호소했고 전 씨는 안 씨 측으로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를 변제 기한으로 1억5000만원을 차용했다.

하지만 전 씨는 결국 잔금을 갚지 못했다. 전 씨는 2013년 8월 안 씨에게 미지급액 및 부가가치세 액수가 적힌 사실확인서·이행각서·금전소비대차 공정 증서 등을 작성해 주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인쇄지함 제조업체 회사(A사)의 명판과 인장을 날인했다. 그 후 3년 뒤인 2015년 10월 전 씨는 기존 제조업체인 A사를 폐업 신고하고 한 달 뒤인 11월 새로운 회사 B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주식은 전 씨 50%, 전 씨의 형이 30%, 전 씨의 아버지가 20% 보유했다.

A사 폐업 당시 사업장 소재지와 B사의 본점 소재지는 동일했다. B사는 A사의 자산과 부채를 포괄적으로 모두 인수했지만 안 씨와의 채무는 인수하지 않았다. 이에 안 씨는 새로운 회사인 B사가 전 씨의 채무를 같이 부담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안 씨 측은 B사가 채무를 회피하기 위해 세운 가족 기업이라며 전 씨의 채무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B사 측은 포괄적으로 인수한 전 씨 사업체의 자산·채무 중 안 씨에 대한 채무는 포함되지 않았다며 빚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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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새 회사, 빚 갚을 필요 없어”

1심은 B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행각서상 빚을 갚을 의무를 지는 전 씨와 새로 세운 B사는 다르므로 B사에는 채무 이행 의무가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이 사건 이행각서는 2012년 10월 작성됐고 피고(B사)는 이로부터 약 3년이 지난 2015년 11월 설립됐다”며 “전 씨는 개인 사업자인 반면 피고는 주식회사여서 그 법적 성질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이어 “원고(안 씨)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전 씨 등이 B사의 법인격을 남용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행각서상 채권자가 안 씨의 남편이라고 해석될 뿐 안 씨라고는 볼 수 없다며 안 씨의 청구는 기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대법 판례를 인용하며 “일반적으로 계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그 계약에 관여한 당사자의 의사 해석 문제에 해당한다”며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언대로의 의사 표시의 존재와 내용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원고(안 씨)가 동산 인도를 구하는 근거는 문서는 이행각서이고 이 사건 이행각서에 기재된 채권자는 안 씨 남편일 뿐 안 씨가 아니다”라며 “실제 이 사건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매매 대금 또는 공사 대금의 지급을 담보하기 위해 금전소비대차 공정 증서, 이 사건 이행각서, 이 사건 사실확인서를 작성해 교부받은 사람은 모두 안 씨 남편”이라고 설명했다.

2심 “채무 면탈 목적이었다면 새 회사가 빚 갚아야”

반면 2심은 1심을 뒤집고 안 씨의 손을 들어줬다. 전 씨가 빚을 피하기 위해 B사를 세웠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우선 재판부는 “사실확인서 하단에 ‘안○○ 귀하’라고 분명히 기재돼 있는 점, 전 씨는 사실확인서 작성 이전에 이미 원고(안 씨)와 이 사건 매매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원고에 대해 매매 대금 지급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점, 전 씨가 잔금 지급을 약속하는 지불이행각서를 작성해 준 적도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원고와 전 씨 사이에 의사 합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B사의 법인격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기존 회사가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기업의 형태·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신설 회사를 설립했다면 신설 회사의 설립은 기존 회사의 채무 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해 회사 제도를 남용한 것”이라며 “기존 회사의 채권자에 대해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으므로 기존 회사의 채권자는 두 회사 어느 쪽에 대해서도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어 “A사 폐업 당시 사업상 소재지는 B사의 본점 소재지와 같은 주소”라며 “전 씨는 A사의 자산 및 부채 등 사업 일체를 B사에 포괄적으로 양도하는 내용의 포괄 양수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전 씨는 기존 개인 사업체인 A사와 실질적으로 동일한 피고(B사)를 설립해 가족과 함께 이를 지배하면서 이 사건 포괄 양수도 계약에 따라 A사의 영업 자산을 피고에게로 유용하거나 정당한 대가의 지급 없이 이전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는 채무 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해 회사 제도 내지 피고의 법인격을 남용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전 씨와 피고가 별개의 책임 주체라는 피고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피고는 원고의 청구에 따라 이 사건 채무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A사와 B사의 소재지 및 사업 내용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A사 사업장 소재지와 피고(B사)의 본점 소재지는 동일한 주소고 두 회사가 영위하는 사업 내용도 거의 일치한다”며 “A사 운영자는 전 씨고 피고 설립 당시 대표이사도 전 씨였으며 피고의 이사들 역시 전 씨의 가족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A사와 B사는 기업의 형태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 동일한 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A사와 B사가 별개의 인격임을 내세워 채무에 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취지다.

대법 “신의성실 원칙 위반”

대법원은 이러한 원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주식회사는 주주와 독립된 별개의 권리 주체이므로 그 독립된 법인격이 부인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하지만 회사가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되고 있는 경우에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므로 회사의 법인격을 부인해 그 배후에 있는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 씨는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자신의 개인 사업체인 A사와 영업 목적이나 물적 설비, 인적 구성원이 동일한 B사를 설립한 것”이라며 “안 씨는 전 씨뿐만 아니라 B사에 대해서도 채무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B사가 이 사건 채무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는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돋보기]
신의성실 원칙은…
신의성실의 원칙은 민법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민법 제2조(신의성실)에 따르면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 쉽게 말해 법률관계에서 당사자로 얽힌 사람들은 신의에 따라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며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그 내용이 다소 추상적인 만큼 판례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대법원 판례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배하는 기준으로 △상대방에게 신의를 공여했거나 △객관적으로 볼 때 상대방이 신의를 가지는 것이 정당한 상태여야 하고 △상대방의 신의에 반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용인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신의성실 원칙이 쟁점이 됐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성실 원칙이란 과거 노사가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면 정기 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더라도 이전 임금을 새로 계산해 소급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