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업무상 배임 판결
산업기술보호법이 정한 산업기술 아니어도 영업 비밀·주요 자산 해당
중국 국적의 A 씨는 중국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개발 회사의 영업부장이다. B 씨는 피해 회사에 OLED 재료 실험용 기판을 제작,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C 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피해 회사에서 연구소 소자 분야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사건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C 씨는 피해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인사 불이익 등을 이유로 퇴사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OLED 관련 산업 기술을 몰래 빼돌려 중국에 있는 동종 업체로 이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C 씨가 다니는 피해 회사는 OLED 전자 재료 제조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로, 2016년 7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부터 산업기술보호법상 규정된 ‘산업 기술(AMOLED 공통층 재료 기술, AMOLED 형광호스트 재료 기술 등)’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2017년 C 씨는 B 씨로부터 “피해 회사의 인원과 설비 등을 이용해 A 씨가 다니는 중국 회사의 재료 성능 평가를 해달라”는 부정 청탁을 받았다. 이에 C 씨는 실제로 재료 성능 평가 결과를 여러 차례 건네준 뒤 현금을 받았다. 또한 C 씨는 자신이 직접 기술을 빼돌리면 향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 부하 직원을 시켜 핵심 기술과 중요한 영업 비밀 파일 37개를 빼돌렸다.
C 씨는 A 씨를 직접 만나 중국 회사로의 이직을 협상하며 피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OLED 기술을 갖고 가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구체적으로 A 씨는 “우리 회사가 제품에 사용되는 재료 정보를 갖고 있으므로 이 정보를 갖고 카피 제품을 만들어 사업화하겠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C 씨는 이직 협상을 진행한 결과 ‘기술 총감’으로 근무하며 월 급여로 약 1664만원, 연봉 약 2억원을 받기로 했다. 이에 C 씨는 경쟁 업체인 중국 회사가 이익을 얻게 하고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는 손해를 끼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국민 경제 악영향 끼쳐 죄질 불량”
1심은 C 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 및 벌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C 씨가 사적으로 피해 회사와 동종 업계 회사(중국 회사)가 요청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단으로 피해 회사의 정보를 이용하는 것은 피해 회사와의 근로 계약에서 정한 노동자로서의 의무에 명백히 반한다”며 “검찰 조사에서 ‘해당 중국 회사는 피해 회사의 경쟁사로, 경쟁사의 이익을 위해 허가 없이 재료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라는 질문에 ‘네’라고 답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 회사의 보안 규정에 따르면 업무와 관련해 습득한 모든 정보 자산은 회사의 허가 없이 외부에 노출해서는 안 된다”며 “C 씨는 중국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피해 회사의 산업 기술을 따로 빼돌렸음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업무상 배임죄에서 ‘손해를 가한 때’란 현실적인 손해를 가한 경우뿐만 아니라 재산상 실해(실질적 손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포함된다”며 “피해 회사의 산업 기술 파일들이 피해 회사의 영업상 주요 자산인 이상 C 씨가 이를 무단으로 반출하는 행위는 시장 교환 가격에 해당하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C 씨는 피해 회사에 적어도 해당 산업 기술 자료가 유출됨으로써 발생하는 매출액 감소분에 해당하는 재산상 실해 발생 위험을 초래했다”며 “이는 피해 회사에 손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국민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 죄질이 불량하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C 씨가 산업 기술이 아니라 제품 재료를 빼돌린 혐의에 대해서는 “C 씨가 넘긴 재료 그 자체가 업무상 배임죄의 객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2심, 징역 2년 실형 선고
2심은 C씨에게 징역 2년에 벌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집행 유예를 판단한 1심과 달리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재판부는 “C 씨는 피해 회사 연구원으로서 경쟁 회사의 재료 성능을 평가해 준 뒤 시장 교환 가격 상당의 이익을 얻었다”며 “피해 회사에 상당의 손해를 가했음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C 씨는 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서 피해 회사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개인적인 목적 등으로 회사의 시설·재료·기계 기구·인력·기타 물품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 반출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며 “그럼에도 C 씨는 B 씨로부터 성능 평가를 의뢰받고 평가 결과 데이터를 건네줬으며 피해 회사에 재산상 손해를 가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산업 기술은 OLED 유기 재료와 관련된 기술로, TV와 스마트폰 액정 화면 등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며 “C 씨는 주요 자료들을 회사 서버에서 빼내 외장 하드디스크에 저장한 뒤 밖으로 빼돌렸으며 국가 핵심 기술 및 산업 기술을 유출했다”고 말했다. 다만 1심과 마찬가지로 2심도 C 씨가 산업 기술이 아닌 재료를 빼돌린 혐의는 무죄로 봤다. 재판부는 “재물 자체가 범행의 객체면 절도나 업무상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지만 업무상 배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대법 “업무상 배임 적용해야”
대법원은 1·2심의 판단을 뒤집고 산업 기술뿐만 아니라 제품 재료를 빼돌린 데 업무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원심은 C 씨가 경쟁 업체인 중국 회사에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료를 보냈다는 이유로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직원이 영업 비밀을 경쟁 업체에 유출하거나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무단 반출했다면 이는 업무상 배임죄의 기수가 된다”고 밝혔다.
이어 “(C 씨가 빼돌린 재료가) 산업기술보호법이 규정한 산업 기술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업무상 배임죄의 객체인 영업 비밀 내지 영업상 주요 자산에는 해당할 수 있다”며 “원심 판결 중 C 씨에 대한 무죄 부분에는 업무상 배임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덧붙였다.
[돋보기]
‘산업 기술 유출’ 왜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될까
산업 기술 유출은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심각한 피해를 준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꾸준히 나왔다. 한국의 산업기술보호법은 절취·기망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산업 기술을 취득하거나 그 기술을 공개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다.
산업 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사용할 목적으로 빼돌리면 15년 이하 징역 또는 15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실형이 선고된 수는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실형이 선고되기까지는 실제로 기술이 넘어가 특정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까지 증명돼야 하는데 해외 서버 등을 이용하면 이를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 등이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해당 기술 유출로 피고인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면 실형이 선고되기는 힘들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기술 유출을 범죄로 여기지조차 않는 분위기여서 수사 공조도 힘든 상황이다.
남정민 한국경제 기자 peu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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