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판교 등불, 초과 근로 여전…변질된 수평 문화, 창업자 등이 의사결정 독점
[비즈니스 포커스] 혁신의 그늘일까. 정보기술(IT)업계의 대표 기업인 네이버와 카카오에서 인사·노무 이슈가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다. 취업 준비생과 직장인들에게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파격적인 복지 혜택으로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기업들의 가려진 민낯이다.지난 5월 28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앱)인 블라인드의 IT 직군 게시판이 떠들썩했다. 40대 네이버 직원 A 씨가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날 분당경찰서는 A 씨가 성남시 분당구 소재 자택 근처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고 현장에서 이 직원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가 발견됐다고 확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고인이 남긴 메모 등에서 업무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정황이 나타나 있어 직장 동료들을 상대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IT업계 “터질 게 터졌다”
소문은 일파만파 확산됐다. ‘네이버 임원 B, C 등이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연루됐다’, ‘고위 임원급에서 괴롭힌 사실을 알고도 방조했다’ 등의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사건 발생 2주 뒤인 6월 7일 네이버 노조는 기자 회견을 열고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조 측은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야간 휴일 없는 과도한 업무량, 부당한 업무 지시와 모욕적인 언행 및 정신적 압박,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를 묵살한 회사의 무책임한 방조 등을 꼽았다. 노조는 A 씨가 담당 임원인 B 씨로부터 모욕과 과도한 업무 지시에 지속적으로 시달렸고 B 씨의 평가에 따라 고인의 연봉 인상률, 인센티브가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물론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의 부여와 부여된 스톡옵션의 회수, 보직 해임이나 업무 변경 등 모든 인사 조치가 결정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A 씨를 비롯한 직원들이 2년여 동안 임원 B 씨에 대해 문제 제기했지만 경영진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강등과 퇴사, B 씨의 승진이 뒤따랐다고 덧붙였다.
지난 2월엔 카카오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불거졌다. 블라인드 앱에 ‘유서’란 제목으로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직장 내 괴롭힘이 담긴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해당 글은 삭제됐지만 다음 날 카카오 내부 조직 문화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글이 커뮤니티에 퍼졌다. 카카오 인사 평가에 과제를 함께 수행한 동료들의 평가가 포함되는데 그중 ‘이 사람과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가’라는 항목이 있고 이 항목의 답변 결과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 123명(1.23%)’이라는 식으로 당사자에게 통보돼 ‘인격 살인’에 가깝다는 지적이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카카오는 여민수·조수용 공동대표와 인사 조직 담당자, 직원 등이 참여하는 화상 간담회를 열고 문제가 됐던 평가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일단락되는 듯했던 내부 갈등은 또 다른 쪽에서 터졌다. 이번엔 보상 문제였다. 경쟁 IT 기업들의 연봉 인상이 줄을 잇자 카카오는 전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상장 이후 주가가 역대 최고점을 찍은 시점에서의 지급일 뿐만 아니라 2년 후부터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인재 묶어 두기에 가깝다는 내부 비판이 쏟아졌다. 이 밖에 일부 직원에게만 고급 호텔 숙박권을 지급하는 이른바 ‘고성과자 선별 복지’ 추진, 임산부 초과 근무 등이 문제로 제기되며 내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 카카오 직원은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할 때는 희생 뒤에 봄이 올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며 “하지만 돌아온 것은 명확한 기준 없이 이뤄진 선별적 보상과 2년 후 행사할 수 있는 역대 최고점의 주식뿐”이라고 말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를 둘러싼 연이은 논란에 대해 업계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초기의 수평적 조직 문화는 수직 관료적으로 변한 지 오래고 높은 성장에도 복지는 뒷걸음질하며 여전히 ‘판교의 등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비단 양 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업계 전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IT업계의 발목을 잡은 가장 큰 문제로 초과 노동과 제왕적 수직 구조 등 두 가지가 꼽힌다.
혁신 발목 잡은 조직 문화
“한 카카오 개발자의 ‘2018년도 근무일지’를 봤다. 나흘 연속으로 오전 10시에 출근, 날이 지나 새벽 2시까지 일했다. 휴일 없이 11일 동안 야간 노동을 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한 달 노동 시간, 313시간이다.” 류호정 정의당 국회의원이 최근 고용노동부가 ‘카카오 수시 근로 감독’을 조사한 결과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등 다수의 노동법 위반을 확인했다며 밝힌 내용이다. 류 의원은 “이번 수시 근로 감독은 본사만 대상이었기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며 “(카카오)계열사 전반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특별 근로 감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네이버의 이번 직원 사망 사건도 초과 노동이 문제가 됐다. 네이버 노조에 따르면 A 씨는 주말과 늦은 저녁 등 시간과 관계없이 고강도의 업무를 했다. 올해 5월 신규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도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렸다. A 씨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단체 메신저 채팅방에서 ‘두 달짜리 업무가 매일 떨어지고 있어 관리하기 어렵다’, ‘장애가 터져서 3일 동안 죽을 뻔했네요’ 등의 메시지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IT업계 종사자들은 판교 등대의 불을 이제는 꺼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6년 11월 한 게임 업체에서 과로사 사건이 터지며 IT 노동자의 고강도 근로 실태가 주목받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2018년 네이버, 2019년 카카오 등이 포괄임금제(연장·야간 근로 등 시간 외 근로 등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임금 제도) 폐지에 나섰지만 장시간 노동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네이버지회·넥슨지회·스마일게이트지회·카카오지회)가 지난해 11월 판교 지역 IT·게임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 환경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 6개월간 응답자 10명 중 3명꼴로 주52시간 초과 근무를 경험했고 초과 근무를 하고도 추가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도 10명 중 1.5명꼴로 나타났다. 벤처업계 특유의 ‘수평적인 조직 문화’도 변질돼 오히려 혁신과 소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이 성장한 이후에도 창업자와 그의 핵심 인력들이 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을 실상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서도 지난 3월 창업자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와 한성숙 사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동석한 인사 담당 임원의 “책임 리더의 소양에 대해 경영 리더와 인사위원회가 검증하고 있고 더욱 각별히 선발하고 있다”는 원론적 답변에 그쳤다. 여민수 카카오 공동대표는 고성과자 선별 복지 추진과 관련해 내부 인트라넷에 ‘이해를 바란다’는 취지의 글로 직원들의 반발만 불렀다.
IT 기업들이 속해 있는 화섬식품노조 관계자는 “IT 기업들은 기존 대기업과의 차별점으로 수평적 조직 문화를 내세웠지만 이번 사건은 이들이 아이로니컬하게도 특정 몇몇 관리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며 “IT 기업의 급성장 이면에 합리적이지 못한 조직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호정 의원 역시 “창업자가 독점하는 의사 결정 구조, 지나친 성과주의가 한 공동체의 준법 의식을 얼마나 무력화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며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낡은 관행을 해체하는 진짜 ‘벤처 정신’을 보여줘야 ‘왕년의’ 혁신 기업의 진짜 ‘혁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네이버를 대상으로 6월 9일부터 특별 근로 감독에 들어갔다.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는지 집중 조사할 방침이고 노동 시간과 휴게 시간 등 노동법 전반의 준수 여부도 점검할 예정이다. 고용노동부는 “네이버에 대해 실시하는 이번 특별 감독이 IT업계 전반의 기업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엄정하게 근로 감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IT업계는 이번 근로 감독이 업계 전반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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