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포 수 감소·디지털화로 상고 채용 문 좁아져
AI·빅데이터에 능숙한 전문 인재 중심 채용

[비즈니스 포커스]
사진= 한국경제신문·연합뉴스·각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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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의 ‘상고(商高) 신화’가 저물고 있다. 상고 신화는 행장을 비롯한 고위 임원진에 상고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만들어졌다. 한때는 덕수상고나 선린상고 등 명문 상고 출신들이 막강 파워를 자랑하며 금융계를 호령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디지털 중심으로 시대 흐름이 변하면서 은행권에서 상고 출신들의 채용 문이 좁아지고 있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은행권 상고 신화의 주인공을 다수 배출하며 ‘금융 사관학교’로 불리던 덕수상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7년 교명을 ‘덕수고’로 바꾼데 이어 그나마 유지되던 특성화 계열은 경기상고로 통합될 예정이다.

수년 전만 해도 ‘은행원의 별’로 불리는 부행장에 상고 출신들이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현재는 대졸 신입 공채 출신 임원들이 부행장에 오르고 있다. 디지털화의 가속으로 그동안 내부 출신 임원이 맡아 왔던 주요 금융지주의 디지털 부문 수장에 삼성과 LG 등 외부 인사들이 유입되고 있다.
1970~1990년대, 똑똑한 상고인 은행 등용
한국의 은행권에선 1970~1990년대와 2010년대 초·중반까지 고졸 출신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특히 1970~1990년대엔 덕수상고·선린상고·경기상고·서울여상 등 명문 상고 출신들의 은행권 취업은 사실상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능력면에서 대졸 행원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남성 고졸 출신들은 입행 이후 1~2년 근무하다 군복무를 마치면 그 기간도 경력으로 인정돼 승진 등에서 유리한 점도 있었다.

그 당시 입행해 상고 신화의 주인공이 된 현역 금융계 주요 인사로는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진옥동 신한은행장 등이 꼽힌다.

그런데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채용 흐름이 급변했다. 구조 조정 한파가 불어닥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채용 문을 아예 걸어 잠갔고 이후 취업 시장에 대졸자들이 넘쳐나면서 고졸 출신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고졸 행원의 몫이었던 텔러(창구 전담 직원) 직군까지 대졸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대 초·중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주요 정책 과제로 ‘고졸 인력 육성’을 내세우자 ‘고졸 채용 확대’ 바람이 은행권에 다시 불었다. 국책 은행인 KDB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을 비롯해 주요 시중은행들이 고졸 채용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KDB산업은행은 15년 만에 고졸 행원을 채용했는데 이들에게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고 대졸 행원과 같은 근무 기회를 주는 등 ‘통 큰 채용’에 나섰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선 창립 61년 만에 처음으로 상고 출신이 한국은행 총재 비서실장(국장급)에 발탁되기도 했다.

당시 고졸 채용 확대 바람은 금융권을 중심으로 시작돼 삼성전자·LG·포스코·현대중공업 등 대기업으로 확산됐다. 정부는 이런 고졸자 채용 활성화 분위기를 감안해 당초 2013년 50%로 잡았던 특성화고 졸업생의 취업률 목표치를 60%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정권에 치이고 AI에 치인 고졸 행원들
그후 1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최근 은행에선 고졸 출신 2030세대 행원을 찾기 힘들다. 1990년대 고졸로 입행한 은행원만이 현재 부·지점장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입행한 50대 은행원 몇몇만이 임원에 올라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10년 만에 왜 이렇게 바뀐 걸까. 우선 2013년 새 정부 출범 후 고졸 채용 신드롬이 탄력을 잃었다. 공공 기관의 절반 정도가 고졸 채용을 외면했다. 50여 개의 기관이 1~2명의 고졸을 채용해 생색만 냈다. 특히 고졸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은행권의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2011년과 2012년 각 90명, 120명을 채용하며 고졸 채용에 두 팔을 걷어붙였던 KDB산업은행은 2013년 채용 규모를 절반으로 줄인 데 이어 이후 10여 명 수준으로 채용 규모를 낮췄다. 이 같은 상황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시중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때 추진했던 채용 형태는 대부분 ‘계약직’이었다. 고졸 행원들은 직무 역량보다 단순 업무 위주로 배치돼 과거와 달리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부족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따라 고졸 행원을 채용했지만 거의 비정규직이었다. 양적으로만 늘어났을 뿐”이라며 “고졸 행원들은 높은 정규직의 문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에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일자리 창출’과 ‘공정’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며 은행권은 블라인드 채용을 속속 도입했다.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출신 지역, 신체 조건, 가족 관계, 학력 등 정보를 배제한 뒤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평가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별도의 ‘고졸 채용’ 절차는 폐지됐다.

최근엔 은행권의 사업 구조 변화로 고졸 행원들이 설 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고졸 사원들은 지점 창구에서 단순 업무를 전담해 왔는데 모바일 뱅킹 활성화 등 비대면 업무 비율이 높아지고 일반 영업점에 인공지능(AI)을 통한 업무 자동화가 구현되면서 이들의 수요가 줄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 점포 수는 총 6405개로, 5년 전인 2016년(7101개)보다 696곳 줄었다. 지난해만 300개가 넘는 은행 영업점이 문을 닫았다.

이런 현상은 고졸 지원자만 겪는 게 아니다. 대졸 취업 준비생도 은행권 진입이 어려워졌다. 시중은행들은 대규모 공개 채용을 진행하는 대신 AI·빅데이터 등에 능숙한 디지털 전문 인재 채용을 늘리고 있다. 시중은행 임직원 수는 5년 전과 비교해 1만 명 이상 감소했다. 올 1분기에만 1200여 명이 사라졌다.

은행 관계자는 “오프라인 점포가 사라지고 빅테크 기업이 치고 들어오면서 최근 금융권 환경이 급변했다. 문과생이나 고졸 대신 정보기술(IT) 전문 인력이나 투자·상담·자산관리에 특화된 인력을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계를 주름잡은 ‘상고 신화’


고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금융지주 회장 또는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며 현재 금융계를 평정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은 누가 있을까.
사라지는 ‘상고 신화’…은행권 인력 구조 지각변동
‘상고 출신 천재’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은 지난해 3연임에 성공했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광주상고를 졸업한 후 1974년 외환은행에 고졸 행원으로 입행하면서 금융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윤 회장은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하는 수재로 꼽히는데 실제 회사에 다니면서 행정고시(25회)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KB 사태 이후 외풍과 내홍에 휩싸인 그룹을 빠르게 안정화시키면서 동시에 2017년 신한금융을 제치고 리딩 금융 자리에 오른 성과도 일궜다. KB금융 경영사가 윤 회장 취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라지는 ‘상고 신화’…은행권 인력 구조 지각변동
‘주경야독’ 고졸 신화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은행에 텔러(창구 전담 직원)로 입사했다. 2015년 9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초대 통합 은행장에 취임해 전산 시스템과 노조 등을 성공적으로 통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그는 업계 최고 ‘영업통’답게 취임 당시 1조원대에 머무르던 하나은행의 당기순이익을 1년 만에 2조원대로 끌어올렸다. 2016년부터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으로 그룹의 안살림을 맡으며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자로 꼽히고 있다.
사라지는 ‘상고 신화’…은행권 인력 구조 지각변동
‘덕출이 신화’ 진옥동 신한은행장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은행권에서 ‘덕출이(덕수상고 출신) 신화’로 불린다. 1980년 IBK기업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1986년 신한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한은행 내 대표적인 ‘일본통’이다. 1997년부터 20년 가까이 주요 경력을 일본에서 쌓아 행장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꼽힌다. 일본 오사카 지점장, 일본 현지 법인 SBJ은행 등을 거치면서 신한금융지주의 최대 주주인 재일교포 주주들에게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