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위기와 달라 빠른 회복 가능…금리 인상 주저하는 미국, 한 발 먼저 올리려는 한국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경제·물가상승률·실업률·무역수지 등 각종 경제 지표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 여부를 가장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표적 변수는 통화량이다. 코로나19 사태 직후부터 위기 국면일 때는 돈이 많이 풀리고 최근처럼 극복되기 시작하면 돈의 공급을 줄여 나가는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이 추진되기 때문이다.말 많았던 테이퍼링은 지난 6월 미국 중앙은행(Fed) 회의에서 가닥이 잡혔다. 궁금한 것은 금융 위기 발생 후 4년 만에 거론됐던 테이퍼링이 코로나19 사태에는 1년 만에 거론됐다는 점이다. 금융 위기는 유동성, 시스템, 실물 경기 순으로 극복해야 한다. 테이퍼링은 경기가 회복돼 후행 지표인 고용 지표가 개선되기 시작하면 추진돼 왔다.
Fed, 설립 100년 만에 맞은 코로나19 위기
위기 극복 3단계 이론으로 볼 때 금융 위기는 시스템 위기에서 비롯돼 초기 충격이 작을 수 있지만 회복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금융 위기 당시에는 유동성을 해결하기 위해 돈이 많이 풀렸고 2013년에야 테이퍼링이 처음 거론됐다. 금융 위기 해결에 시간이 걸려서다.
반면 뉴노멀 디스토피아의 첫 사례에 해당하는 코로나19 사태는 초기 충격이 매우 컸던 것이 특징이다. 이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공포에 휩싸였고 세계 주가는 한 달 만에 반 토막이 날 정도로 폭락한 것은 하이먼 민스키 리스크 이론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아무도 모르는 위험’이기 때문이다.
Fed는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1913년 설립된 이후 가 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매입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제한으로 달러화를 공급하겠다는 방침을 선언했다. 중앙은행의 고유 기능인 ‘최종 대부자’ 역할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스템 문제에서 비롯된 종전 위기와 달리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 사태는 백신만 보급되면 세계 경제가 ‘절연’에서 ‘연계’ 체제로 빠르게 변할 수 있다. 풀린 돈을 회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장률이 높아지면 자산 거품과 인플레이션 우려가 불거진다. 실제 추진 여부와 관계없이 벌써 테이퍼링이 거론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미국의 장·단기 기대 인플레이션을 보면 2년 후에는 3%에 근접할 정도로 높지만 10년 후에는 2.5% 아래로 떨어진다. 최근 불거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란 가능성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Fed에 속한 대부분의 인사가 테이퍼링 추진에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Fed 인사들은 마치 합창하듯 금융 완화 의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더 이상 이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돈이 차고 넘쳐 수익률이 0.08%인데도 역레포(reverse REPO) 수요가 있다고 본다. 역레포는 투자 적격 대상 가격이 적정 가치 이상으로 올라 추가 투자 때 예상되는 수익보다 거품 붕괴에 따른 위험이 높다고 판단될 때 금융사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Fed가 지난해 3월 세컨더리 마켓 회사채 펀드(SMCCF)를 통해 사들였던 정크 본드를 긴급히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 투자 적격 수단만을 대상으로 하는 유동성 조절 정책 원칙상 Fed는 정크 본드 매각 결정이 테이퍼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시작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Fed 회의에선 시작부터 ‘킥 오프’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시장의 반응을 수용했다. 킥 오프는 ‘시작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지만 ‘돌발 변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美보다 먼저 금리 인상 조짐 보이는 韓
6월 Fed 회의가 끝난 이후 새로운 궁금증은 Fed의 금리 인상에 앞서 한국이 먼저 금리를 올릴 필요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은행의 선제적 금리 인상에 대해선 금융 위기 이후 금리 인상 시기와 속도를 결정할 때 경제 지표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 반응까지 감안한다’는 Fed의 새로운 기준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테이퍼링과 달리 기준 금리 인상은 증시를 비롯한 금융 시장과 통화 정책 전달 경로(금리 변경→총수요 변화→실물 경기 조절)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특정국의 금리 체계상 기준 금리와 금융 시장 간 관계가 ‘안정적’이라면 금융 시장의 반응을 주목할 필요가 크지 않지만 미국은 2004년 금리 인상 때부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왔다. 금융 위기 이후에는 기준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장 상황이 더 긴박해지자 양적 완화로 유동성을 보완해 왔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기준은 ‘최적 통제 준칙’이다. 최적 통제 준칙은 Fed가 양대 목표로부터의 편차를 최소화하는 기준 금리 경로를 산출해 통화 정책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시장 상황을 반영하는 유연성 면에서 테일러 준칙 등에 따라 산출된 적정 금리를 토대로 통화 정책을 운용하는 종전의 방식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양대 기준을 조합하면 둘째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금리 인상 시기와 속도를 경제 지표와 금융 시장의 반응을 동시에 고려해 결정하면 최적 통제 준칙에 따른 금리 인상 경로보다 앞당기거나 늦출 수 있다.
금리를 올릴 때 금융 시장에 충격이 우려되면 그 시기가 최적 통제 준칙에 의한 경로보다 늦춰지고 반대의 경우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Fed의 통화 정책이 시장에 수렴하는 관행을 감안할 때 8월 열릴 잭슨홀 미팅에서 테이퍼링 추진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테이퍼링은 위기가 정상적으로 극복되고 있다는 정책적인 판단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금융 완화만 지속하면 마약 환자에게 마약을 더 주는 꼴이 될 수 있어 경제 복원력마저 잃을 수 있다.
투자는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양적 완화에서 테이퍼링으로 전환될 때 가장 민감한 주식 투자는 대형 기술주에서 경기 민감주와 배당주로 조정해 놓으면 수익률을 방어할 수 있다.
저금리를 바탕으로 한 레버리지 상품과 거품이 낀 투자 수단은 정리해 놓아야 한다. 경제가 정상을 찾아 가는 만큼 엘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캐시 우드 아크자산운용 CEO 등을 따라가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시점이다.
테이퍼링 추진을 앞두고 한국은행은 올해 안에 금리 인상을 공식화하고 있다. 하지만 테이퍼링과 달리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와 속도가 가변적인데 한국이 먼저 금리를 올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캐나다 중앙은행이 23개 신흥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자료를 보면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외자 이탈 가능성은 한국이 가장 낮게 나온다. 신흥국에서 외자 이탈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금리 인상’이 아니라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쌓는 일이다.
한국은 통화 스와프 등을 통해 확보해 놓은 제2선 자금까지 포함하면 외환보유액이 5500억 달러에 달해 가장 넓은 의미의 캡티윤 모형에 의해 추정된 적정 외환보유액보다 1500억 달러 이상 많다.
가계 부채를 줄이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시각도 2018년 11월 당시 강남의 집값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다가 경기를 더 침체시켰던 이른바 ‘김현미 악몽’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가계 부채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은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그 부담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와 소상공인에게 집중되는 ‘상흔 효과’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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