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 알도, 뉴욕에 매장 열고 미국 진출…반대했던 아버지도 매장 둘러보고 ‘흡족’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③ 구찌의 창업자인 구치오 구치의 첫째 아들 알도는 미국 뉴욕에 구찌 매장을 열기로 결심했다. 미국인들이 이탈리아 패션에 관심이 높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구찌의 최대 고객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들은 구찌의 수제 가죽 가방과 신발 액세서리 스타일을 특히 좋아했다.알도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뉴욕 매장을 열자고 재촉했다. 구치오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은행에서 대출해 돈을 대줬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뉴욕에 가려면 로마, 파리, 보스턴을 거쳐 가야 해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알도는 뉴욕에서 프랭크 듀건 변호사를 만나 초기 자본금 6000달러를 들여 미국 최초의 구찌 법인 구찌숍스 주식회사를 세웠다.
미국 법인은 구찌 상표를 이탈리아 바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됐다. 그 후 설립된 구찌의 해외영업 법인은 모두 프랜차이즈였다. 알도는 피렌체에 있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새로 만든 미국법인의 명예 대표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에 매장을 내는 것 자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는 격분했다. “이 정신 나간 것들, 당장 집으로 돌아와”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는 아들들이 어리석고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다며 질타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며 무모한 계획을 계속 추진하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알도는 아버지의 걱정과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오히려 연로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뉴욕으로 모셔와 매장을 보여줬다. 매장을 둘러본 구치오는 오히려 기뻐했다. 흥분해 그곳이 마치 자신의 계획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겼다. 구치오는 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좋은 평판으로 사업이 순항하는 것에 만족했다. 알도가 뉴욕 매장을 연 날로부터 불과 15일이 지난 1953년 11월 구치오는 심장 마비로 급사했다. 그의 나이 일흔둘이었다. 창립자 구치오, 1935년 일흔둘에 심장 마비로 급사
한때 가난한 접시닦이였던 구치오는 자수성가하며 백만장자로 성공했고 그가 세운 회사는 유럽과 미국 두 대륙에서 유명해졌다. 구치오는 몇 년 후 구찌 왕조를 유명하게 만든 쓰라린 가족 분쟁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경쟁이 긍정적인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아들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일이 많았다. 손자 파울로는 이렇게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아들들끼리 경쟁시키면서 구찌의 핏줄임을 증명하라고 몰아붙이곤 하셨어요.”
그뿐만 아니라 구치오는 최초로 불거진 가족 분쟁의 원인도 제공했다.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맏이이자 유일한 딸인 그리말다를 상속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리말다는 52세였고 오랫동안 구찌 매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남편 조바니는 1924년 구찌를 파산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이다. 아버지 구치오가 아들들에게 내린 불문율은 여자가 회사 경영권을 상속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말다는 남동생들이 사업 결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도록 막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훗날 남동생들만 동등한 비율로 구찌 지분이 상속된 것을 알고 경악했다. 그녀는 농가와 토지 일부, 많지 않은 현금만 상속받았다. 동생들과 합의에 이르지 못한 그리말다는 본인의 몫을 얻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리말다는 설립 초기부터 지켜보던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구치오의 사망으로 아들들은 희비가 교차했다. 그들은 강인하고 유능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목표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어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사업은 세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뉘어졌고 처음에는 결과도 좋았다. 알도는 뉴욕 매장 오픈으로 해외 진출이라는 꿈을 이뤘고 막내 로돌프는 밀라노 매장을 관리했으며 둘째 바스코는 피렌체 공장을 운영했다.
이들의 화합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돌프와 바스코가 알도를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그들은 큰형 알도가 아버지의 가치관과 크게 동떨어진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또한 알도는 언제나 가족 전체가 동의할 때만 일을 시작했다. 그가 의견을 내더라도 결정은 항상 가족 이사회에서 내렸다.
알도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일했고 1959년에는 로마 매장을 현재의 콘도티 거리 8번지로 옮겼다. 1960년에는 뉴욕 5번가와 55번가 교차로에 있는 세인트레지스 호텔에 새 매장을 열었다. 1961년에는 이탈리아 온천 도시 몬테 카티니와 런던의 올드본드, 팜비치의 로열 포인시아나 플라자에 새 매장을 냈다. 1963년에는 파리 방돔 광장 가까이에 있는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에 첫 프랑스 매장을 열었다. 알도는 1년에 휴가를 사나흘 넘게 쓰는 일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혹사시키며 일했다. 런던과 뉴욕에 아파트를 두고 매년 12차례 이상 대서양을 넘나들면서 일했다. 한 친구가 취미가 있는지 물었을 때도 웃기만 했다.
알도가 1968년 시계 사업가 세브랭 운데르망을 만나면서 구찌의 중요한 신세품이 탄생했다. ‘선제 공격을 하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던 운데르망은 동유럽의 이민자 아들로, 열네 살에 고아가 돼 누나가 살던 로스앤젤레스와 유럽을 오가며 성장했다. 열여덟 살 때부터 시계 도매 업체 주베니아에서 일하며 시계 사업을 하면 상당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 브랜드 사용권 주고 막대한 로열티 받아
알도와 만났을 때 운데르망은 프랑스 시계 회사 알렉시스 바틀레이의 미국 영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1972년 운데르망은 구찌 브랜드의 시계를 제조하고 유통할 수 있는 사용권을 갖게 됐다. 운데르망은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세브랭 몽트르 주식회사를 세웠고 그 후 25년간 구찌 시계 회사를 정상급 주자로 키워 냈다.
첫째 구찌 시계는 고전적인 스타일로 ‘모델 2000’이라고 불렸다. 운데르망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제휴한 우편 광고를 통해 제품을 판매했다. 이 광고가 시작된 이후 구찌의 매출은 5000개에서 단숨에 20만 개로 급증했다. 모델 2000은 2년 만에 100만 개 넘게 팔리는 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올랐다. 문자판을 금색 팔찌에 끼워 넣는 형태로 만들어 다른 색상의 팔찌로도 바꿀 수 있는 여성용 팔찌 시계도 뒤이어 출시했다.
구찌의 시계 사업은 최근 기준으로도 높은 수준인 15%의 로열티를 받았다. 구찌에는 노다지인 셈이다. 운데르망은 구찌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내줬던 시계 라이선스를 29년 동안 보유했다. 1990년대 후반에도 시계 사업은 연간 2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그중 3000만 달러가 구찌 로열티로 지급되면서 구찌가 가장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주요 소득원이 됐다.
자료=사라 게이 포든 ‘하우스 오브 구찌(다니비앤비)’ 등 참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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