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전 직종 평균소득 기준 배상” 1·2심 뒤집고
“전문직으로 소득 얻을 개연성 인정돼” 판결

[법알못 판례 읽기]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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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숨값’에도 차이가 있을까. 하나뿐인 생명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한다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때로는 목숨값을 불가피하게 돈으로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고를 유발한 이가 피해자 유족에게 지급해야 하는 손해 배상액을 산정할 때가 대표적이다.

같은 사고를 당했더라도 당사자 또는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손해 배상액은 천차만별이다. 손해 배상은 일실수입·위자료·장례비 등으로 구성된다. 일실수입은 피해자가 사고로 잃어버린 장래 소득을 의미한다. 은퇴할 나이까지 남은 기간과 시간당 근로 소득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각자 직업과 소득이 다르기 때문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교통사고로 숨진 의대생…일실수입 산정 기준은

최근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대생에 대한 손해 배상금은 ‘전문직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법조계의 이목이 쏠렸다.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김재형)는 교통사고로 숨진 의대생 A 씨의 부모가 보험사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일실수입에 관한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2014년 9월 7일 오전 2시 55분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 상태인 B 씨가 운전하는 차량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B 씨는 천안 상명대입구 앞 편도 2차로 도로(제한 속도 시속 50km)를 시속 70km로 달리고 있었다. B 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70%로 만취 상태였다. A 씨는 같은 달 18일 중증 뇌부종으로 사망했다.

사고 이후 A 씨 부모는 B 씨가 가입한 자동차 보험회사인 C 사를 상대로 약 10억8500만원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부모 측은 A 씨가 사고 당시 한 의과대학의 본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던 점을 들어 ‘보건의료전문가’로서의 월 급여를 토대로 일실수입을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차 레지던트‧군의관 등을 거쳐 의사로 일하면서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월 급여가 손해 배상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보험사의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상액은 청구액보다 훨씬 낮은 약 4억9000만원으로 책정했다. 재판부가 의사 직종이 아닌 2014년 기준 25~29세 남성의 전 직종 평균 수입인 월 284만원을 기준으로 손해 배상액을 산정했기 때문이다.

1심 재판부는 “아직 대학생이던 망인이 반드시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의사로 종사하면서 원고의 주장에 상응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1심 재판에 대해 원고와 피고는 모두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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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의대생은 의사 될 가능성 매우 높아”

하지만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A 씨 부모의 주장대로 보건 의료 전문가의 월 급여를 토대로 손해 배상액을 산정해야 한다고 봤다. A 씨가 생존했다면 의대를 졸업해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불법 행위로 사망한 피해자의 일실수입은 원칙적으로 불법 행위로 손해가 발생할 당시에 피해자가 종사하고 있던 직업의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해야 한다. 만약 피해자가 사고 당시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면 수입 상실액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종사해 얻을 수 있는 일반 노동 임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다만 특정한 기능이나 자격 또는 경력을 갖고 있어 앞으로 그에 대응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상당한 개연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할 수 있다.

의대생이었던 A 씨가 의사가 될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여부가 1‧2심과 대법원의 판결을 갈랐다.

1‧2심은 A 씨가 의대생이었다는 사실 만으로는 앞으로 보건 의료 전문가로서의 소득을 얻을 만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A 씨는 장차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로서 종사할 상당한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의과대학 등과 같이 전문직을 양성하는 대학에 재학 중인 피해자가 장차 전문직으로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지 여부는 피해자의 연령, 재학 기간, 학업 성과, 전공 학과, 전문직을 수행하기 위한 자격의 취득 가능성 등 피해자의 개인적인 경력은 물론 전문직을 양성하는 대학 졸업생의 졸업 후 진로, 취업률 등을 모두 고려해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A 씨는 예과 2년간 학점 평균은 3.16, 본과 3학년 1학기까지 본과 학점 평균은 3.01로 양호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A 씨처럼 유급이나 휴학 없이 본과 3학년 2학기까지 등록한 학생의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의사국가고시 합격률은 92~100%에 달했다.

A 씨의 그간 학업 성과, A 씨와 유사한 성과를 보인 다른 의대생들의 자격증 취득 현황 등을 놓고 보면 A 씨의 자격증 취득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판부는 “원심이 A 씨의 일실수입을 고용 형태별 근로실태조사보고서의 대졸 이상 전 직종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산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돋보기]
워라밸로 바뀐 일실수입 계산법…“월 근무 일수 22일 아닌 18일”

일실수입 산정과 관련해 최근 이목이 쏠린 다른 판결도 있다. 주5일 근무제 시행,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 확산 등으로 평균적인 노동 시간이 과거보다 줄어든 만큼 사고로 일할 능력을 잃은 사람에게 지급하는 일실수입도 예전보다 낮춰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4부(부장판사 이종광)는 관절염을 치료받던 중 의료 과실로 장애를 입은 D 씨가 의사와 병원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D 씨는 왼쪽 관절염을 치료받던 중 의료 과실로 신경을 다치는 피해를 봤다. 발목을 들지 못하는 족하수를 앓게 돼 노동 능력을 잃게 된 것이다. 1심은 노동자가 종전 관례대로 매달 22일 일한다고 가정하고 일실수입을 6000만원으로 산정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관례를 깨고 노동자가 매달 18일 근무한다고 가정해 일실수입을 계산했다. 이에 따라 일실수입은 약 6000만원에서 5100만원으로 900만원가량 줄어들었다. 치료비를 포함한 손해 배상금 총액은 1심 약 7800만원에서 7100만원으로 줄었다.

재판부는 “오늘날 경제가 선진화되고 레저 산업이 발달해 노동자들도 생활의 자유를 즐기는 추세”라며 “월간 가동 일수(근로일)가 22일이라는 기준이 처음 등장한 1990년대 후반 이후 2003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주5일 근무로 변경됐고 2013년에는 대체 공휴일이 신설되는 등 근로일이 줄고 공휴일이 증가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고용노동부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도시 일용 노동자에 대한 고용 형태와 직종‧산업별 월 가동 일수가 22일보다 감소하고 있다”며 “이를 반영해 2009~2019년 단순 노무 종사자 비정규 노동자와 건설업 노동자의 가동 일수 평균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최한종 한국경제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