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맞추다 방만해진 사업 구조…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눈치게임’의 결과

[경영 전략]
셔터스톡
셔터스톡
늘 하던 일에 파묻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세상에서 버려진다. 경영학 책에는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기업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설 자리를 잃은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경영학의 속성상 새로운 사업을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도전과 혁신’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데다 그런 변화에 성공한 회사와 경영자의 영웅담을 쓰려면 실패한 반면사례를 대비시켜야 하는 비겁한 속사정도 있다. 그러다 보니 망한 회사와 경영자를 이런저런 실패 사례에 대입해 ‘부관참시’하는 한심한 일도 벌어진다(망한 회사는 반박이 없으니 이처럼 편한 일이 없다).

그런데 도전과 혁신의 이름으로 시류에 맞춰 이것저것 손대는 방만한 경영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회사 안의 일이라 문제가 쉽게 드러나지도 않고 복잡한 사연들이 얽히면 숨기며 시간 보내다 더 크게 망하게 된다. 안되는 사업은 빨리 접는 것이(특히 마찰적 비용과 고통만 없다면) 경제의 선순환에 낫지만 여전히 ‘뭐라도 해보라’는 요구가 더 많은데, 막상 도전과 혁신인지 회사 돈으로 폼만 잡고 있는지 가려내기는 매우 어렵다.혁신 전도사의 속사정세상이 지각변동을 할 때 흐름에 올라타면 생각지도 못한 큰돈을 번다. 1990년대 말 정보기술(IT) 벤처 붐에 힘입어 당시로선 참신한 영상 기술과 이를 활용한 진단 장비로 ‘벤처 스타’가 된 P 사장도 비슷한 사례다.

벤처기업들이 ‘개발연대의 기득권이자 외환 위기의 주범’으로 매도되는 재벌과 대비되는 참신한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P 사장은 ‘혁신의 전도사’가 됐다.

기업인을 넘어 사회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펴는 ‘선각자’로 인정받으며 한껏 고무된 P 사장은 경영학 책에 나오는 그럴듯한 이론은 모조리 회사에 적용했고 미디어는 그를 새로운 시대의 경영자로 치켜세웠다. 새로운 성공 모델에 흥분한 정치권은 파격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P 사장은 IT 분야의 신기술이 적용된 사업들에 과감하게 진출하고 다른 한편 유망하다는 벤처기업들을 인수해 계열사에 편입했다.

특히 콘텐츠 분야의 가능성에 주목해 영화·만화·음원의 제작과 유통을 위해 여러 사업 파트너들에 출자하고 차세대 통신 기술 관련 기술 벤처에도 투자 협력을 확대했다.

5년이 지나면서 새로 만들어진 신사업본부는 20여 개를 넘어섰고 출자해 사업 협력을 진행하는 회사는 40개에 달했다.

P 사장은 물론 회사의 주요 경영진이 이런 신사업본부와 사업 파트너의 현안을 따라잡지 못하니 의사 결정이 계속 겉돌고 핵심 기술이 새나가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의 기대에 맞춰 미래 가치를 인정받고 금융시장의 돈을 끌어들이는 것은 경영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사업의 본질을 벗어나 대중과 미디어의 막연한 기대, 이에 편승하는 정치적 슬로건에 무게 중심이 쏠리면 거품이 눈과 귀를 가리게 된다.

재벌이 하면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고 IT 벤처가 하면 도전과 혁신이라는 발상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최소한의 사업성 평가는 ‘굴뚝 산업에나 맞는 꽉 막힌 관리’로, 투자회사들에 대한 점검과 개입은 ‘벤처 정신에 대한 모독’으로 매도되니 투자자들의 돈만 덧없이 뿌려진 셈이다.

정말 유망한 신사업 벤처라면, 또 진심으로 돈보다 벤처 정신과 도전이 중요했다면 P 사장은 회사 돈이 아닌 자기 돈을 출자했어야 마땅하다. 회사 내부의 신규 사업이라면 시장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의사결정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얼치기 전문가들의 공허한 말들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돼 세상을 흔들면 당연한 얘기가 ‘답답한 소리’가 된다. 그러면 시류에 편승해 건수를 잡는 사람들이 회사 안팎에서 힘을 얻는다. 어쩌면 P 사장도 이런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 얹혀 둥둥 떠다녔는지도 모른다.“아니면 말고”...책임은 없다굴지의 대기업집단을 물려받은 M 회장은 건설·중공업·기계장비 등 이른바 ‘오래된 굴뚝 산업’ 중심의 사업 구조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각광받는 업종으로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금수저 승계’에 비판적인 여론에 더해 개인적 이유들로 규제 당국과 사정 기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M 회장으로서는 어떻게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참신하고 새로운 그리고 착한 경영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도전과 혁신’은 그런 노력의 증거가 된다.

“특정 업종의 경쟁 우위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역량을 키우라”는 조언은 M 회장의 노력에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이 회사에는 다양한 실험은 많은데 이상하게도 실패한 사업을 가려 마무리하는 사람은 없다.

너도나도 하나씩 회사 돈으로 벌인 나름 참신한 사업들은 여기저기 옮기며 합병했다 분리했다 이름도 바꾸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M 회장이 직접 시작한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구성원의 아이디어를 회사의 기반을 활용해 사업으로 만들면 그것이 개인의 경험과 업적이 되고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이 된다면 이처럼 좋은 일은 없다.

사내 벤처 제도를 통해 참여한 개인들이 자신의 사업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더욱 좋다. 하지만 사업 선정과 지원은 정확해야 한다. 잘된 사업을 키우고 실패한 사업을 정리하는 일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자기 돈이면 하지 않을 사업을 회사 돈이니 요령껏 해보다 빠지고 혹시 잘 안되면 구석에 묻어 두면 그만이라면, 이 회사는 주주의 돈으로 자리 만들고 경력 꾸미는 도둑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M 회장이 도전과 혁신을 강조하지만 막상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내도 팔자를 고칠 수는 없다. 지분이 아닌 약간의 보너스만 주기 때문이다.

사업보국의 열정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의 보상에 영혼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크게 책임지지 않고 경영자의 혁신 흉내에 장단 맞추다가 눈치껏 몸을 빼 좋은 자리로 가려는 ‘회사 공무원들의 눈치 게임’에 딱 맞는 조건일 뿐이다. 서로 요령껏, 눈치껏 눈감으며 봐주는 사이에 사업부와 계열사는 계속 늘어난다.책임지고 해내면 팔자가 달라져야사업 구조가 눈에 띄게 방만해지면 조직 개편으로 사업부들을 통합하고 이름을 바꾼다. 독립된 계열사들이면 인수·합병(M&A)하면 된다. 죽기 살기로 속사정을 따라잡지 않는 한 사업 단위의 숫자가 줄어들면 나름 정리가 된 느낌이 든다(그래서 ‘핵심 역량에 입각한 사업 집중’이라는 황당한 변명이 먹힌다). 고만고만한 일들을 폼 나게 벌이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이런 어이없는 눈치 게임에 분개한 뜻있는 관리자가 가망 없는 사업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려고 들면 사방팔방에 원수를 지게 된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눈치껏 서로 덮어준 속사정이 드러나 책임을 떠안게 된 사람들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기 때문이다. 빚 갚고 종업원들을 내보내는 고통스러운 일이 기다린다. 이런 악역을 도맡아도 별다른 보상이 없다면 나설 사람이 있을까.

오로지 돈을 목표로 움직이는 사모펀드 판이라면 제대로 된 사업을 성사시키면 대대손손 먹고살 돈이 생긴다. 가망 없는 사업을 맡아 정리해도 마찬가지다. 고만고만한 사업으로 이야깃거리 정도 만들면 보너스를 받고 동료들 사정에 눈 질끈 감고 악역을 맡아도 원수만 지고 끝인 눈치 게임 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회사도 이 원리가 작동해야 한다.

어려운 일일수록 책임지고 해내면 팔자가 달라져야 회사가 잘되고 나라 경제도 잘된다. 도전과 혁신을 내걸고 속으로는 시류에 맞춰 회사 돈으로 폼만 잡아도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회사는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것이 낫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