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 60배 폭풍 성장…재계 7위 그룹 일궈
친환경·우주 사업으로 ‘100년 기업’ 기틀 완성

[스페셜 리포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에서 직원들이 항공 엔진을 검수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에서 직원들이 항공 엔진을 검수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이제 우리는 ‘제2의 창업’을 의미하는 새로운 출발, 즉 자기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각오로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기업, 책임을 다하는 기업 그리고 일생을 통해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기업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1981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취임 후 맞은 첫 창립기념일 행사에서 밝힌 포부다. 그로부터 40년 뒤 한화그룹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 항공우주, 에너지, 금융, 기계·방산, 건설, 유통, 레저 등 83개 계열사를 거느린 자산 규모 217조원의 재계 7위 대그룹으로 변모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2차 석유 파동, 외환 위기 사태, 글로벌 금융 위기 등 한국 경제를 한순간에 뒤흔든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남다른 결단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켰다.

김 회장은 부친인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가 만 59세로 타계하자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최연소 총수’에 올라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한화그룹을 재계 7위 반열에 올려놓았다. 총자산은 김 회장 취임 당시 7548억원에서 217조원으로 288배 늘었고 매출액은 1조1000억원에서 65조4000억원으로 60배 늘었다.

김 회장은 “글로벌 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 본능을 배워야 한다”며 ‘글로벌 경영’을 강조했다.

지난 40년간 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결과 1981년 7개에 불과했던 해외 거점은 현재 469개로 증가했고 해외 매출은 2020년 기준 16조7000억원으로 확대됐다. 이는 그룹 전체 매출의 25%에 해당한다. 2021년 8월 1일 취임 40주년을 맞이한 김 회장은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100년 기업 한화를 향해 나가자”고 밝혔다.

재계에서 김 회장은 ‘M&A 승부사’로 통한다. 경영적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통찰력과 도전 정신으로 선제적인 구조 조정과 굵직굵직한 기업 M&A를 과감하게 추진하면서 한화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한화그룹이 재계 7위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에는 M&A를 통한 성장 전략이 주효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한화그룹 제공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한화그룹 제공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거침없는 M&A
한화솔루션·한화생명 등 인수


김 회장은 1982년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솔루션 케미칼·첨단소재 부문)을 인수해 석유화학을 수출 효자 산업으로 키웠다. 당시 한양화학은 75억원, 한국다우케미칼은 430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그룹 경영진은 부실 위험이 크다며 강하게 인수를 만류했지만 김 회장은 “이런 때일수록 알짜 석유화학 기업을 싸게 사들일 수 있다”며 인수를 밀어붙였다.

이때 매각이 급한 다우케미칼의 사정을 역이용해 인수 의사를 강력하게 보이되 가격 협상을 뚝심 있게 진행했고 결국 매매 대금 전액 분할 납부 등 매우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김 회장은 석유화학의 장래가 어둡지 않고 국제 경기도 다시 회복될 것으로 봤다. 김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고 적자 수렁에 빠졌던 두 회사는 한화그룹 인수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변신했다.

한화그룹은 기존 화약·기계·석유화학 등 중후장대형 사업 위주로 성장해 왔다. 김 회장은 정아그룹·한양유통 인수를 통해 레저·유통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1985년 정아그룹(현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을, 1986년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해 레저·유통 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 명품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인수했던 한화갤러리아는 인수 4년 만에 매출액을 2배로 늘렸고 한국 최대 명품 백화점으로 자리잡게 됐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골프장·콘도·프리미엄 리조트 등을 영위하는 한국 최대 규모의 프리미엄 종합 레저·서비스 기업으로 도약했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외환 위기 직후 한화그룹은 뼈를 깎는 구조 조정으로 계열사 수를 37개에서 17개로 줄이면서 위축된 상황이었다. 김 회장은 1998년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계열 기업을 반 이하로 줄인다는 것은 뼈와 살을 깎는 아픔으로 마취도 없이 한쪽 폐를 제거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화그룹은 1999년 말 구조 조정 작업이 완료됨에 따라 2000년부터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유통·레저·금융 등 3대 축을 중심으로 성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2년 적자를 지속하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자산 127조원의 한화생명으로 키워 냈다. 김 회장은 금융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키우기 위해 대한생명 인수전에 직접 나섰다.

당시 대한생명은 대주주의 전횡과 계열사에 대한 부실 대출 등으로 누적 결손금만 2조3000억원에 달했고 부실 금융회사에 지정되며 3조5000억원의 공적자금까지 투입된 상황이었다. 보험의 핵심인 영업 조직도 붕괴 직전이었다.

계열사 경영진이 인수를 극구 반대했지만 김 회장은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며 인수를 결정한다. 김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를 추진하면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만나 이 회장에게 삼성의 생명보험 경영 경험과 어떻게 하면 생명보험 사업을 잘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M&A의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모든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2년 동안 무보수로 대한생명 대표이사에만 전념해 경영 정상화에 매달렸다. M&A 후 통합(PMI)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영업 조직의 동요를 막기 위해 보험설계사와 임직원들을 직접 만나는 등 적극적인 현장 경영을 펼쳤다.

김 회장은 대한생명의 조직 문화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인수 다음 해인 2003년 5월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한화생명 연도상 시상식에 참석해 와이셔츠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애창곡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열창하기도 했다.

한화생명은 인수 6년 만에 누적 손실을 모두 털어냈고 29조원에 불과했던 총자산도 2020년 127조원으로 커졌다. 대형 생명보험사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도 상장했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외환 위기 땐 구조 조정의 마술사로
고용 보장 위해 손해도 기꺼이 감수


김 회장은 외환 위기 속에서 부채 비율을 줄이기 위해 한화바스프우레탄·한화에너지 등 알짜 사업을 매각했고 대림산업과 유화 사업 맞교환 등 창조적인 구조 조정을 단행해 산케이신문·로이터통신 등 외신으로부터 ‘구조 조정의 마술사’란 별명을 얻었다.

혹독한 구조 조정에도 불구하고 한화그룹에서는 노사 갈등 등 잡음이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고용에 대한 김 회장의 남다른 철학과 ‘신용과 의리’를 중시하는 신의 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김 회장은 회사를 매각할 때도 고용 보장을 관철하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기도 했다.

한 예로 1999년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의 매각 협상 때 김 회장은 상대방인 정몽혁 당시 현대정유 사장을 직접 만나 “20억~30억원은 손해볼 테니 인수 과정에서 단 한 명도 해고하지 말아 달라”고 고용 보장을 최우선으로 요구한 일화가 유명하다.

실제로 매각 이후 한화에너지 706명, 한화에너지프라자 456명이 완전히 고용 승계됐다. 한화그룹의 M&A에서는 여전히 고용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그린 에너지가 미래 산업혁명을 이끌 주역이라고 판단하고 한화그룹을 글로벌 녹색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태양광 사업에 주목했다. 태양광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낙점하고 2012년 파산했던 독일의 큐셀을 인수해 한화큐셀을 만들었다.

한화큐셀도 인수 당시에는 누적 영업 적자가 4420만 달러, 공장 가동률은 20~30%에 불과한 상태였다. 한화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큐셀을 인수하겠다고 하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큐셀이 중국 업체와의 가격 경쟁력에서 크게 밀리는 상황을 지적하며 ‘매력적이지 않은 거래’라고 평가했다. 한국 기업들도 2011년부터 시작된 태양광 시장 침체로 태양광 사업에서 발을 빼던 시기였다.

하지만 김 회장은 태양광 사업의 수직 계열화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큐셀 인수를 결정했다. 평소 김 회장은 ‘태양광 사업은 회사의 이익이 아닌 국가와 인류에 기여하는 길’이라며 흔들림 없이 사업에 매진할 것을 강조해 왔다.

미래를 내다본 김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고 한국·미국·중국·말레이시아 등지에 생산 공장을 보유한 한화큐셀은 미국·독일 등에서 태양광 모듈 부문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각국의 글로벌 판매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2020년 매출 3조7000억원을 기록하며 한화그룹의 캐시카우로 부상하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2017년 12월 장남 김동관 당시 한화큐셀 전무와 함께 한화큐셀의 중국 치둥 공장을 방문해 임직원들과 기념 촬영
하는 모습  /한화그룹 제공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2017년 12월 장남 김동관 당시 한화큐셀 전무와 함께 한화큐셀의 중국 치둥 공장을 방문해 임직원들과 기념 촬영 하는 모습 /한화그룹 제공
M&A로 성장…삼성 빅딜로 윈-윈
태양광·그린수소·항공우주 선도


한화·삼성 빅딜은 김 회장이 이끈 M&A 40년 역사에서 화룡점정으로 평가된다. 한화그룹은 2014년 삼성의 방산 및 석유화학 부문 4개사를 2조원대에 인수하는 빅딜로 경제계를 놀라게 했다. 한화·삼성 빅딜은 외환 위기 때처럼 정부의 주도가 아닌 그룹 간 자발적 사업 조정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빅딜 이후 사업 고도화와 시너지 제고를 통해 방산 부문은 명실상부한 한국 1위로 도약했고 석유화학은 매출 20조원을 초과하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삼성은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면서 조직 슬림화, 경영 효율화를 꾀할 수 있었고 삼성의 계열사들이 석유화학 1위인 한화그룹에 인수되면서 실적이 크게 올라 한화와 삼성 모두 윈-윈한 거래로 평가된다.

한화그룹은 K방산·K에너지 사업을 위해 2014년 삼성그룹의 방산, 화학 4개 계열사를 인수하는 민간 주도의 자율형 빅딜을 통해 선택과 집중에 기반한 핵심 사업 경쟁력을 강화했다. 인수한 삼성 4개사의 경영진을 포함한 임직원들을 중용했고 정년·급여·복지 등 각종 처우와 노동 조건도 유지했다.

한화그룹은 각 계열사의 경영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잇단 물적 분할로 사업 부문별 전문성을 살린 독립 법인들을 설립했고 중복된 사업은 과감히 합쳤다.

한화그룹은 삼성에서 인수한 삼성테크윈을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항공엔진·항공사업)를 중심으로 그 아래 한화디펜스(방산), 한화시스템(IT·방산), 한화정밀기계(정밀·공작 기계), 한화파워시스템(에너지), 한화테크윈(시큐리티) 등 5개 자회사가 자리한 사업 구조를 완성했다.
한화솔루션의 태양광 모듈 공장 /한화그룹 제공
한화솔루션의 태양광 모듈 공장 /한화그룹 제공
한화 창립 70주년 앞둔 영원한 현역 CEO
M&A 성공 신화 계속된다


최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민간 인공위성 제조업체 쎄트렉아이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항공 엔진과 쎄트렉아이의 위성 시스템 역량을 완성하는 우주 산업 밸류 체인을 구축했다.

한화시스템은 한국 처음으로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시장에 진출해 에어 택시 기체인 ‘버터플라이’를 개발 중이고 UAM 기체 개발과 함께 항행·관제 부문의 정보통신기술(ICT) 솔루션도 선도하고 있다.

한화토탈은 인수 당시인 2014년 영업이익이 1727억원에 불과했지만 인수 3년 만에 1조5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화종합화학도 2014년 42억원의 적자에서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한화종합화학은 석유화학 기초 화학 물질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 한국 1위 생산 업체다.

한화종합화학은 수소 관련 그린 에너지를 주목하고 있다. 2021년 3월 가스터빈 성능 개선 및 수소 혼소 개조 기술 보유 업체 미국 PSM과 네덜란드 토마센에너지를 인수해 수소를 기반으로 한 민자 발전 사업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차세대 성장 사업인 우주 사업을 키우기 위해 올해 초 우주 산업을 총괄하는 조직 ‘스페이스 허브’를 출범시키고 발사체와 위성 통신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페이스 허브는 김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 회장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40년의 도약을 발판 삼아 100년 기업 한화를 위해 미래 모빌리티와 친환경 에너지, 스마트 방산과 디지털 금융 솔루션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